김지율 작가 ‘나의 도시, 당신의 헤테로토피아’
진주의 기억과 풍경 그리고 산책자 이야기

김지율 작가/ 경상국립대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진주, 나는 오랫동안 진주를 그리워했다. 내 파릇한 젊은 날을 보낸 진주에 다시 돌아올 날을 꿈꾸며 타지를 헤맸다. 고향은 아니지만 진주로 돌아온 것은 내게 ‘귀향’이었다.

얼마 전 편집장이 김지율 작가의 <나의 도시, 당신의 헤테로토피아> 인터뷰를 제안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사람 같았다. 어떻게 인터뷰를 요청할까 막연했다. 며칠 후 단디뉴스 사람들과 다원에 들렀다. 마침 그곳에 김지율 작가가 있었다. 뜻밖의 이른 만남이었다.

우연 아닌 인연으로 그녀와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존재의 출발이자 뿌리인 ‘고향’ 진주는 물리적인 장소로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이질적인 시간과 추억으로는 특정한 이들에게만 열려 있는 장소이다. 아름다운 나의 도시, 당신의 헤테로토피아를 걸었다. 그곳의 장소를 기억하고 그 장소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이들의 기억을 나누는 일이 이렇게 가슴 뛰고 그리운 일임을 한참 뒤에 알았다.

-<나의 도시, 당신의 헤테로토피아>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은 ‘K’와 함께 ‘9일 동안’ 진주를 걷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남성당 한약방, 진주극장, 기차역, 남강, 개천예술제와 국제재즈페스티벌, 박생광과 국립진주박물관, 이성자미술관, 연암도서관, 진주문고, 중앙시장, 수복빵집, 형평운동과 관련한 곳들 그리고 골목골목에 자리한 장소들이 나온다.

그럼 K는 누구일까. K는 김지율 작가의 실제 친구인 이방인이자, 나이자 타인,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에 나오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진주가 고향인 김지율 작가는 ‘헤테로토피아’를 주제로 연구하다가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는 진주를 익숙하지만 낯선 시선으로 보고 싶었다.

‘헤테로토피아’란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의미를 설명해주세요.

헤테로토피아는 여러 학자들이 이야기했지만 푸코가 개념화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현실의 공간이 있고, 이상향이라고 하는 유토피아가 있고 그것과 반대되는 디스토피아가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잖아요.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는 이상향의 ‘다른(heteros) 장소(topos)’입니다. 휴양지, 정신병원, 영화관, 정원, 백화점,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을 비롯해 게토나 새터민 거주지와 같은 배제와 도피의 공간 그리고 최근 메타버스 등도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마다 그 형태는 다양하고 또 변화되고 있지만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反)장소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나를 구운몽이라고 부른다

지구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서 금방 해가 저물어 엄마는 구름을 낳고 여전히 눈이 두 개, 귀가 두 개였던 걸 제일 기뻐했어 그럴 때 너는 내 귀에 대고 말하겠지 귓속말 너머 귓속말 물고기 너머 물고기 구름 너머 구름 그리고 내 이름은 구운몽 너에게 해줄 이야기는 아직 많지만 커피엔 각설탕은 빼고 라고만 할게 우린 아직 아홉의 눈동자 아홉의 구름 그리고 아홉의 꿈

김지율 시인의 시 ‘내 이름은 구운몽’ 중에서

 존재도 없고 장소 또한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 '존재의 장소'라는 상태에 길을 내주는 걸까? 
 존재도 없고 장소 또한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 '존재의 장소'라는 상태에 길을 내주는 걸까? 

‘사람들이 나를 구운몽이라고 부른다’가 책의 ‘첫째 날’ 제목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첫 시집 <내 이름은 구운몽>과도 관련이 있나요?

어릴 적 아버지가 종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집에 오면 거기에 동시, 독후감, 편지를 썼고 사진과 함께 벽에 붙여놓았던 게 창작의 시작이었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건 대학 때입니다. 시인들에게는 첫 시집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창작과 연구를 같이 해나가는 저로서는 더 의미가 큽니다.

8년 만에 낸 첫 시집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이 되었어요. 시집을 내고 ‘구운몽’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첫 시집으로 두 번의 상금을 받아 저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웃음) 제일 존경하는 선생님께 시집을 보내드렸는데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읽어야 하는 시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책은 9일 동안 진주 곳곳을 걸으며 그 장소와 사람들을 같이 느끼고 꿈꾼다는 의미인데 결국은 시 때문에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경상국립대 인문학연구소에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강의를 통해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연구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현재 해방 후 ‘현대시에 드러나는 각 시대별 헤테로토피아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아직 연구되지 않은 분야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탈근대적 장소의 연장으로 현대시의 공간 담론으로써 헤테로토피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2022년에 <문학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떻게 기억되는가>를 출간했는데, 문학이 우리 삶의 한 공간이자 플랫폼이라면 우리는 현실적 장소이자 가상의 공간인 문학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 공간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결국 시와 문학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 장소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에 고향인 진주의 장소들과 이야기들이 절실했어요. 말하자면 제 시와 연구의 뿌리였기 때문이죠. 기억이 사는 집을 장소라고 한다면 그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잖아요.

‘진주’라는 장소가 가진 헤테로토피아의 특징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진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역사가 많은 도시죠.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 운동인 형평운동이 일어난 곳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신문 《경남일보》가 창간되었죠. 또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축제인 개천예술제까지. 논개뿐 아니라 최초로 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곳입니다. 그런 정신들이 바로 안티와 저항으로서의 헤테로토피아적 기질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장소들에서 비롯되는 개인들의 내밀한 기억은 비슷하지만, 특별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특히 ‘천년고도의 도시’ 진주는 먼 과거의 것들을 보존하는 당위와 언제나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이탈의 욕망이 공존하는 도시입니다.

제 어머니는 평생 궂은 일을 많이 하셔서 손에 굳은살이 박혀 있어요. 저는 그 굳은살처럼 잊을 수 없는 또 잊혀지지 않는 장소, 그 내밀한 장소들에는 오랜 시간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다른 시간과 기억을 가지고 있죠. 저에게 목련이 환하게 핀 석류공원에서 낮술을 마시던 스물 몇 살의 그때도 진주는 가장 낯설고 아픈 도시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와 어려움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책 집필은 2018년부터 기획해서 5~6년 정도 걸렸습니다. 책에는 30여 명의 분들과 진행한 인터뷰와 산문이 실려 있습니다. 장소에서는 그곳에서만 나오는 에너지가 있잖아요. 인터뷰를 위해 옛 기록물이나 그 장소들을 직접 찾으러 다니며 녹취하고 사진을 찍었고, 여유치 않은 경우에는 이메일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요청에 한 분도 거절하지 않으셔서 정말 고마웠는데 ‘진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많이 느꼈습니다. 진행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고, 시간과 체력적인 면에서도 수월치 않았지만 귀한 말씀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던 건 사실입니다.(웃음)

'하나의 공간이 기억에 담기면 하나의 장소가 된다' @사진=배길효 사진가
'하나의 공간이 기억에 담기면 하나의 장소가 된다' @사진=배길효 사진가

진주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와 그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저는 금산에서 꽤 오래 살았어요. 제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둘레가 5km가 넘는 금호못이 보였습니다. 봄이 되면 못 주위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도는 것이 제가 얻은 가장 큰 기쁨이었어요. 벚꽃이 피는 계절. 그 못을 지나 구불구불 청곡사로 가는 길과 바람 따라 질매재를 넘어가는 길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길이에요.

그 길가에 말없이 피어 있는 벚꽃들. 벚꽃의 그림자와 사람의 그림자가 꿈속에서 노는 것 같은 길이죠. 오랫동안 ‘통과할 수 없는 문’을 혼자서 통과해야만 했던 시절. 그 길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안을 준 지극히 개별적인 그래서 남다른 길인데, 최근 혁신도시로 이어진 길에 있던 큰 벚나무들이 대부분 잘려나가 기억의 한 부분이 몽땅 잘려나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책을 집필하며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한 분 한 분이 다 인상에 남고 또 감사하죠. 원고를 마무리하고 나서 오랫동안 서성거렸어요. 글로 다 드러내고 싶지 않고, 또 표현할 수 없는 지점들을 어떻게 할까. 불편한 장소들에서 미끄러지는 감정들을 어떻게 드러낼까를 고민하다가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배길효 선생님 사진을 봤어요. 진주의 여러 장소들을 다니며 자기만의 색깔로 실험적인 사진을 찍는다는 걸 직감했어요. 제가 장소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균열이나 틈의 지점들이 보였어요.

제가 존경하는 리영달 선생님의 사진에는 진주에 대해 말해야 하는 지점이 담겼다면 배길효 선생님의 사진에는 말할 수 없는 지점이 담겨 있었어요. 그래서 같은 듯 다른 두 분의 사진을 모두 책에 담았습니다. 책의 제일 첫 페이지에 있는 ‘문 없는 문’을 찾으러 다녔던 심정이라고 할까요.

책 첫 페이지에 있는 '문 없는 문' @ 사진=배길효 사진가
책 첫 페이지에 있는 '문 없는 문' @ 사진=배길효 사진가

책에 시인들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었는데요.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고, 시인의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진주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고 했어요. 시와 문학도 그 침묵의 힘으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활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진주가 고향인 허수경 시인은 삶과 문학으로 이 지점을 잘 보여 줍니다.

*트랜스로컬리티로서의 고향-타향-글로벌이라는 새 고향으로 이어지는 장소들에서 스스로 ‘몫 없는 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며 현실의 희망과 절망의 이중적 감정에 천착했는데요. 독일에서 시를 창작하고 고고학을 연구하며 ‘꽃밥’이라 불리는 진주비빔밥을 평생 그리워하며 방아씨를 구해 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평생 그리워한 고향에 대한 장소애는 창작의 근원이자 이유라고 봅니다.

*‘트랜스(trans)’와 ‘로컬리티(locality)’의 합성어로 사회 전반적인 분야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기억 속의 옛 진주 장소들 @
기억 속의 옛 진주 장소들 @'나의 도시, 당신의 헤테로토피아'

‘여섯째 날’에서 ‘중앙시장 상인들’ 인터뷰에서 많은 상인들 중에 이분들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 바로 중앙시장의 상인들 인터뷰예요. 왠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주의 중앙시장은 100년이 훨씬 넘는 전통과 두어 번의 화재를 겪은 서민들의 생존의 장소죠. 새벽시장이 열리는 골목골목들과 어시장과 건어물시장. 그릇 전과 실크와 옷가게들까지. 무척 더운 여름에 시작하여 몇 계절로 이어졌습니다. 그분들의 생애 이야기를 녹취해서 밤새 들었어요. 그분들의 이야기가 바로 시이고 문학이더라구요. 밤새 듣다가 실수로 녹음한 파일과 사진들을 날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인터뷰는 성별과 나이 같은 경계 없이 진행했어요. 한 장소에서 15살부터 78살까지 장사를 하고 계신 분도 계셨고, 아기를 낳고 5일 만에 시장에 나왔는데 불이 나는 바람에 불편한 몸으로 피난했던 이야기. 퇴근길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신 분도 계시고, 당뇨병 때문에 다리를 절단하신 분도 계셨는데 모두 시장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셨어요. 그곳에는 센티멘탈이란 말이 통하지 않죠. 심한 몸살에도 이불을 둘둘 말고 앉아 있다가도 손님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어나 장사를 하죠. 오히려 집에 있으면 더 아프다고 하시면서요.

책이 세상에 나와서 어떤 역할을 했으면 좋을지 말씀해주세요.

사실 한 도시와 장소가 담고 있는 서사와 알레고리를 재구성하는 일은 그 지역 사람들의 자율과 연대로 가능한 일이죠. 진주가 ‘창의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도시와 장소에 담긴 스토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진주가 담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진주만의 고유한 색을 발견하고 누구나 머물고 싶은 지역의 풍부한 정서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동안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작은 물꼬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

김지율 작가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고된 일을 마치고 밤늦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걸어오던 길, 그 길을 따라 걸어봐야 현재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진주의 ‘과거’와 ‘현재’를 담았다면, 앞으로 진주의 ‘미래’와 진주 밖에서 보는 진주의 이야기도 담아보고 싶다고 했다.

<나의 도시, 당신의 헤테로토피아> 북토크는 3월 경상국립대 인문학연구소 오이코스, 4월 다원, 5월 진주문고에서 진행된다. 책에 인터뷰한 사람을 같이 초대해서 글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김지율 작가는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처럼 진주 곳곳을 걷는 사람을 생각하며, 어딘가 걷고 있을 것만 같다. 그녀를 만난 여운을 안고 진주를 한없이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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