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5월 27일 밤 2시 45분경,

바다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해협을 일단의 함대가 소리 없이 들어섰다.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배의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선수와 선미의 마스트등과 적색 녹색의 좌우현등은 물론 선실의 불빛까지 가리고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선단을 멀찍이서 몰래 따르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선실에서 새어 나온 불빛을 보고 쫓아온 일본의 순양함이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다 적임을 확인한 척후선은 새벽 네 시경 본영에 전문을 날린다.

"러시아 국적 함대 출현. 쓰시마 남단에서 북동으로 항진 중."

▲ 송진포는 칠천도가 앞을 가로막아 바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포구.

대한제국을 겁박하여 거제 송진포를 일본의 해군 기지로 만들어 놓고 기다리던 연합함대 도고 헤이하치로 대장은 진해와 송진포의 함대를 출격시킨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는 이 일본군 제독은 러시아 함대가 세로로 줄지어 오는 해협의 가장 좁은 길목에서 이들을 맞는다. 그 옛날 임진년 조선을 침략한 그들의 함대가 견내량 좁은 물길로 줄지어 들어오는 것을 한산 앞바다에서 에워싸고 궤멸시켰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본떠 일렬로 늘어서 전함 측면의 함포로 다가오는 적선에 집중 포격을 한다. 세로로 오던 적은 자국 함선에 가려 효율적인 포격을 하지 못하고 거의 모두 가라앉고 만다. 그나마 남은 전함조차도 동해까지 추격해온 일본 연합함대에 침몰한다. 그 날 대마도 남쪽을 지나가는 해협에서 모두 수장된 이 러시아 함대가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이 이끄는 저 유명한 발틱 함대다.

▲ 송진포.

19세기말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을 위해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여 청일 전쟁으로 일본이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독일, 프랑스와 함께 삼국 간섭 압력을 행사하여 뤼순과 다렌항을 빼앗아 태평양 함대의 모항으로 삼는다. 이렇게 되자 대륙 진출에 제동이 걸린 일본은 극동 패권을 쥐기 위해 뤼순을 공격하여 태평양 함대에 타격을 주면서 발을 묶어놓고 대한제국에서 러시아를 몰아낸다. 러시아 정부도 애써 얻은 부동항을 빼앗길 수는 없는 터라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을 고립시켜 전쟁을 이길 요량으로 잔존 태평양 함대에 무적의 발틱 함대를 지원하기로 한다. 1904년 10월 14일 로제스트벤스키의 지휘아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항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만 9천km의 대장정을 나선다.

한편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항진한다는 첩보를 듣고 태평양 함대와 발틱 함대가 연합하지 못하게 뤼순과 인천 앞바다에서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잔존 태평양 함대를 완전 궤멸시킨다. 혹 하나를 제거하고 한 숨 돌린 일본 군부는 장장 7개월이 넘게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오는 발틱 함대를 기다리며 전함의 수리와 정비를 끝내고 전략 전술을 논의한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일본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목은 세 갈래였다. 그 하나는 대마도를 지나가는 대한 해협이고 또 하나는 혼슈와 홋카이도를 지나는 쓰가루 해협, 나머지 하나는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소오야 해협이었다. 일본 군부는 난감했다. 전력을 나누어 세 길목을 한꺼번에 다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 일본 함대가 연합해서 대적해도 이길 수 없는 무적의 발틱 함대가 아닌가. 어차피 한 곳을 선택하여 사활을 걸어야만 했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소오야 해협을 지키자는 군부의 결정을 뒤집고 송진포에 기지를 구축하고 진해에 함대를 배치하고 훈련시킨다.

송진포. 도고의 선택은 탁월했다.

▲ 도고 헤이하치로 동상. 옛 송진초교 뒤에 있다.

칠천도가 앞을 가로막아 바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포구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면 당시의 거함이 마음대로 정박하고 드나들 수 있는 넓고 깊은 만이 호수처럼 잔잔하다. 병영을 구축하고 훈련할 수 있는 완만한 배후 산록을 따라 대봉산을 오르면 진해, 부산, 가덕도와 대마도까지 조망할 수 있어 대한 해협을 감시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지다. 도고는 1904년 2월에 이미 체결한 한일의정서 제 4조 "제 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그리고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 규정한 불평등 조항을 들어 송진포를 강제 점유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 그 과정에서 집이 불타고 부녀자들이 겁간 당하는 등 일본 군인의 패악질이 말할 수 없었지만 무능한 정부는 제 나라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보상조차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르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원숭이 곰 늑대 여우 들짐승을 닥치는 대로 불러들였다가 안마당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집식구들의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만들었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판단대로 로제스트벤스키는 긴 항해에 지치고 연료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는 증기선이라 연료가 석탄인데 항해중 불미스런 사고를 저질러 석탄회사로부터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리하게 달려온 배도 하루 빨리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여 정비 수리를 해야 최상의 조건으로 전투할 수 있다. 그러자면 위험하지만 대한 해협으로 빠져 나가 동해를 가로질러야 한다. 그러나 송진포의 정탐과 진해만의 재빠른 출격에 걸린 발틱 함대는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응용했다는 전술에 참패함으로서 사실상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고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 일본제국 해군 기지였던 옛 송진초교는 지금 문화예술센터로 변신했다.

황포, 구영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송진포를 뒤돌아본다. 그 옛날 버려진 곳에서 유형의 땅으로 되었다가 남의 나라 전쟁에 속살 벗겨지고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은 포구가 기울어가는 햇살에 붉게 물들었다. 지맥을 끊어 산을 깎고 나무를 베어 잔디를 입힌 골프장 너머 오랑칼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황포를 지나 한 구비 돌아드니 산으로 에워싸인 한적한 갯마을이 나타난다. 거제도 제일 북쪽 구영이다. 진해 안골과 빤히 마주 보고 서쪽으로는 마산. 고성과 연결되고 동북으로는 가덕, 다대로 통해 연안 여객선 기항지로 북적거렸으나 거가대교 개통으로 하루아침에 조용한 갯마을이 되었다. 구영의 원래 이름은 영등, 또는 영등포다. 고전문학자 고영화 선생은 영등포를 '바람을 타고 순행하는 포구'라고 그 어원을 유추한다. 永登은 '진 등' 또는 '긴 등성이'라고 한자어를 훈독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뭍의 지명에 사용할 때 붙이는 뜻이고 갯가 포구에서는 옛부터 전해오는 영등할미에게 바라는 뱃길의 안전과 풍요로운 바다, 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달릴 수 있는 돛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한자음을 차용해서 쓴 경우라고 한다. 왜구들이 부산으로 들어와 연안을 노략질 하며 남해를 돌아 서해로 나가자면 이곳을 지나 견내량으로 빠져 나가야만 했다.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여 영등진이라 하고 삼포왜란 때 진해 안골포진과의 협공으로 승전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을 공격하던 원균이 패해 영등진에 들었다가 매복한 왜군에 병사와 전함을 잃고 칠천량에서 전사한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둔덕면 덕호리로 영등진이 옮겨지자 이곳을 구영등진, 구영등으로 부르다 구영으로 바뀌게 되었다. 윗마을 쪽으로 성터의 기단부가 남아 있으나 성 안팎으로 논밭과 건물이 들어서 온전한 형태는 찾기 어렵다. 이 곳 구영 역시 전략적 요충지라 시달림이 많았던 곳이다.

거제도 서쪽 끝 견내량을 건너 최북단 여기 구영까지 오면서 어디 한 곳 아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바다 물빛이 백 년 전과 많이 닮았다. 러시아와 중국이 서해에서 해상 합동 훈련으로 세를 과시하고 일본은 평화헌법을 개정했다. 일각에서는 강정 해군기지의 미군 기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저마다 이 땅에서 힘 좀 써보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이 나라 권력자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눈 멀어있다. 이 글을 쓰는 내일이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민초들의 눈물을 훔쳐 줄 따뜻한 손이 많이 뽑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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