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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의 산촌일기] 산촌의 일상. 하루의 행복

기사승인 2018.03.05  09: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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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그 수많은 행복한 순간들을 벌써 잊어버리다니.

05:13 뒤척이다 눈을 떴다. 매일 이 시각이면 눈을 뜬다. 아내는 밤 11시에 방영하는 ‘미스티’라는 드라마에 빠져 다음 날은 영락없이 늦잠이다. 기지개를 켜는데 온 몸이 뻑적지근하다. 어제 땔감나무를 하느라 몸을 많이 썼었다. 컴퓨터를 켰다. 이런저런 매체를 드나들며 세상사를 엿본다. 민박 예약현황을 확인한다. 방바닥이 서늘하다. 밖으로 나가 화목보일러에 나무를 넣어주고 온도를 맞췄다. 잠시 서서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름을 갓 넘긴 달이 서산으로 기운다. 새벽인데도 그다지 춥지 않다. 봄이다. 인기척에 뒷마당 거위 ‘덤벙이’가 낮은 소리로 꾸륵거린다.

07:08 아내는 방바닥을 뒹굴뒹굴하고, ‘바둑이’ ‘고미’ ‘행운이’ ‘꽃분이’는 아내를 피해 이리저리 몸을 옮기며 졸린 눈을 뜨지 못한다.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날이 훤하게 밝았다. 뒷마당 닭장을 열어주었다. 두 마리 남은 닭이 날개를 푸득이며 뛰어나오고 거위 ‘덤벙.이’와 ‘새데기’가 예의 그 덤벙거리는 걸음걸이로 닭장 문턱을 넘는다. 닭은 늙어 두 마리가 이틀에 한 개의 알을 낳는다. 달걀이 턱없이 부족하다. 닭 열 마리 가져오기로 한 간디유정란농장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다. 빨리 갖다 달라고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간밤에 분 바람에 마당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였다. 마당을 쓸었다. 꽃밭을 살펴보니 복수초가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알리움과 상사화 싹이 실하게 올라오고 있다.

▲ 김석봉 농부

08:22 아들놈과 보름이가 서하를 데리고 올라왔다. 아내는 닭국을 끓였다. 서하가 있어 반찬 챙기느라 아내도 끼니맞이가 걱정되는 듯하다. 콩나물을 무치고 김을 구웠다. 콩나물은 서하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다. 한 숟갈 옹골지게 밥을 퍼 먹는 서하를 보면서 아들 내외와 우리는 “우와~ 박수!” 하며 박수를 쳐준다. 그럴 때마다 저 어린 것이 활짝 웃는다. 다섯 식구의 아침밥상이 정겹다. 가위바위보로 설거지당번을 정하고 현관을 나오는데 우리집 길냥이들이 떼로 모여 쳐다본다. ‘예삐’ ‘회색이’ ‘코점이’ ‘아롱이와 다롱이’ ‘백돌이’ ‘억울이’ ‘점박이’ ‘까망이와 막둥이’... 사료 한 바가지 퍼 마당에 뿌려준다.

12:25 밭일을 하고 돌아왔다. 모진 추위를 견딘 마늘과 양파밭을 손질했다. 지난 해 양지쪽 양파모종을 부었던 고랑에 양파모종이 제법 잘 자랐다. 얼어 죽어 빈자리에 양파모종을 옮겨 심었다. 따라 온 고미와 꽃분이가 천방지축 밭을 훌싸다닌다. 맨 위쪽 밭에 심었던 시금치는 겨우내 고라니들이 다 뜯어먹고 뿌리만 남았다. 퍼뜩 지난 여름 그물망 안으로 들어온 그 고라니가 생각난다. 이른 아침 꽃분이와 밭을 둘러보러 갔었다. 꽃분이와 마주친 고라니는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커다란 물통에 빠져버렸다. 물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야생고라니를 두 팔로 안아서 들어내 주었었다. 야생고라니를 안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고라니가 요즘도 밭을 다녀가는지 빈 밭고랑마다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다. 올 가을에는 시금치씨를 두어 고랑 더 뿌려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내일은 낫을 벼려와 뒷두렁 마른 검불을 걷어내고 산돼지를 대비해 쳐둔 그물망을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배가 고파온다.

13:43 졸음이 쏟아진다. 늘 그랬듯 이 시각이면 낮잠을 자곤 한다. 아내는 서울 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저녁엔 아는 식당 주방장 면접도 보고, 내일 음식모임이 있어서란다. “서랍에 돈 있으니 챙겨가...” 드러누운 채 잠에 취한 코맹맹이소리로 배웅을 한다. 오후엔 비가 온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오려나. 해야 할 비설거지가 많은데. 쌓아둔 땔감나무도 덮고, 말려둔 메주가루도 들여놔야 하는데. 비닐 가져가서 밭에 쟁여놓은 퇴비도 덮어야지. 깊은 잠은 들지 않고 엎치락뒤치락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마당에 나서자 멀리 지리산 위로 두꺼운 구름장이 몰려오고 있었다.

16:12 간디유정란농장에서 닭이 왔다. 열 마리다. 상품성 떨어진 달걀을 생산하는 닭은 도축해서 육계로 내는데 이놈들이 바로 그놈들이다. 내가 거두어주지 않았으면 도축되어 팔려나갈 닭들이다. 이제 우리 식구가 되었다. 3년 전 이웃 농장에서 도축하러 실려가는 닭 열 마리를 가져와 함께 살았는데 그게 닭과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었다. 그동안 여덟 마리가 죽고, 두 마리만 남았다. 우리가 먹을 달걀이 부족해 열 마리를 더 넣은 것이다. 닭은 실하고 똘망똘망하다.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우리집 뒷마당에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모이를 뿌려주고 물그릇을 채웠다. 아들놈과 함께 텃밭 검불을 태우는 것으로 비설거지를 마쳤다.

18:36 아들놈이 저녁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한다. 소주도 한 병 챙겨오라고 한다. 보름이가 만들었다는 골뱅이메밀국수무침이 식탁 가운데 놓였다. 서하는 벌써부터 신났다. 유달리 국수를 좋아하는 서하는 닭국에 말은 메밀국수를 벌써부터 한 움큼씩 먹기 시작했다. “오늘은 카페에 손님이 좀 있었냐?” “공치지는 않았어요. ㅎㅎ” “아부지, 마당 수도는 고칬나.” “어제 다 고칬다.” “서하 내일 문화센터 가는 날인데...” “비가 많이 오면 가지 마라.” “요거트 씨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네.” “내일 느그 엄마 올 때 서하 딸기 좀 사오라 할까?” 간간히 잔을 비우고 채우면서 도란도란 저녁식사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19:57 섬광이 번쩍이고 뇌성이 크게 울었다.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벼락이 떨어지고 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껐다. 꽃분이는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 바둑이는 자꾸만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고, 고미도 깜짝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엎드려있다. 행운이는 고요하다. 행운이는 우리 집에 들어올 때부터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네 마리의 식구들이 내 팔다리에 기댄 채 요란한 밤을 보내고 있다. 불을 껐다. 먹물 같은 어둠이다. 잠시 지난 시절을 생각하다가 살아가야 할 앞날을 생각한다. 앞으로의 삶보다 지난 날의 삶이 더 행복하게 남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이처럼 욕심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 오늘 그 수많은 행복한 순간들을 벌써 잊어버리다니.

김석봉 농부 ksb@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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