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실수하면서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새 학기를 맞이한 아들이 ‘학생 생활 조사서’를 가져왔다. 가족 구성원의 이름과 집주소 등을 거침없이 써내려가다 멈춘 곳은 장래희망을 묻는 항목이었다. 학생 본인과 학부모가 원하는 장래희망을 각각 쓰도록 되어있었다. 아들은 ‘웹툰작가’를, 나는 ‘건축설계사’를 각자 썼다. 날 쏘아보는 아들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쳐다보지 않고 대꾸했다. “이게 뭐냐고? 건물 지을 때 설계도 그리는 사람. 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도 이 그림은 아니지. 나는 이런 거 완전 싫다고” “그럼 뭐 어때. 너는 니가 원하는 거 썼잖아. 나도 내가 원하는 거 쓸 자유가 있는 거야.” 아들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건축설계사. 앞에는 ‘잘 나가는’이라는 괄호가 생략되어 있었다.

▲ 재인 초보엄마

내가 이 직업을 왜 적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 것은 좀 더 나중이었다. 아들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나는 그 점을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들의 그림 실력이 한국 미술계의 대를 이을 만큼 월등하거나 미술시간에 선생님의 눈에 띌 만큼 남다른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아들의 그림은 개성이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근작법을 무시한 채 표현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고, 고슴도치 엄마는 생각했다. 아들은 요즘 인기 있는 웹툰 작가들이 그림을 잘 그려서 된 건 아니라고 했다. 스토리를 개연성 있게 창작하고 상상을 초월해서 구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그림을 못 그려도 할 수 있다고, 아들은 굳게 믿는 눈치였다. 내 머릿속에선 다른 궁리가 가지를 쳤다. 그런 상상력이라면 건물을 지을 때도 얼마든지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겠다는. 더 솔직히 말하면 아들이 설계한 건물에 살고 싶은,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가 되어보고 싶은 욕구가 투영된 선택이었다. 빈 땅에 철골을 세우고 한 장 한 장 벽돌을 얹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견고하게 눌러썼다. 말하는 대로 된다잖아. 쓰는 대로도 되는 거라고 우기면서 건축설계사를 들이민 배경에는 사실 가리고 싶은 것이 있기도 했다. 상위 1% 잘 나가는 작가 뒤에서 연봉 백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꿈을 씹어 삼키며 버티는 99%의 나머지 작가들이 있다는 설명을 굳이 아들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울 엄마는 건물주의 로망을 품은 속물이라고 알아도 좋으니까 99%의 현실은 모르고 살았으면 했다. 아직은 그랬다.

그리고 주말, 온 가족이 문구점으로 몰려갔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딸은 준비물이 많았다. 집에서 목록을 미리 적었다. 이래야 실수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근데 막상 문구점에 가서 보니 적은 걸 가져오지 않았다. 남편과 딸아이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즉각 눈을 피하면서 한 톤 더 명랑하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쓰면서 다 기억했어. 보자... 일기장하고 알림장, 10칸 공책, 스케치북, 색연필, 싸인펜... 거봐, 다 기억나잖아, 그지?” 입에서 말이 나옴과 동시에 재빨리 준비물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았다. 잊기 전에 담아야지. 그 사이 아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중학생쯤 되니까 자기 준비물은 스스로 챙기는구나. 흐뭇해하며 딸아이의 새 학기 준비물을 한 아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어느 코너에선가 불쑥 아들이 나타났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아크릴판과 몇 가지 물건들을 여러 개 손에 들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레고 촬영할 때 쓰면 좋겠더라고요. 이거는 건물 벽 표현할 때, 이거는 도로 표시, 이거는 나무랑 잔디밭” 코에서 뜨거운 김이 나왔다. “학교 준비물은 없어?” “없는데?” “전혀?” “응, 없어” 중학생은 새 학기 준비물도 없구나. 다르긴 하네.

학습에 그다지 유용해보이지 않는 물건들만 잔뜩 안고 나타난 아들을 대신해 중학생 코너로 갔다. 오답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다섯 권을 담아서 계산을 마쳤다. ‘만점작렬 수학오답노트’ 집에 와서 펼쳐보니 과연 자기주도 학습욕구가 작렬할 듯한 구성이었다. 위에는 그날 공부한 날짜와 단원명, 문제유형을 쓰고 중간에는 틀린 문제를 스스로 풀어보는 칸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왜 틀렸는지, 원인을 쓰도록 했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문제를 계속 틀리면 답이 없다. 오답노트는 두 번 틀리는 걸 막기 위한 용도였다. 이대로만 한다면 아들의 새 학기 학습은 순풍에 날개를 달겠구나. 부푼 마음으로 아들에게 오답노트 사용법을 설명했다. 그러나 아들은 틀린 문제를 다시 보는 것 자체를 귀찮아했다. 그러면 틀린 문제를 계속 틀리게 된다고 강조했지만 이제는 내 설명도 귀찮아했다. 양쪽 콧구멍에서 뜨거운 화산재가 뿜어져 나왔다.

오답노트를 혼자 다시 펼쳐보았다. 1. 단원명 - 내 인생 2. 문제유형 - 쓸데없이 고집부리다 기회를 놓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또 상처를 줌. 3. 올바른 문제풀이와 정답-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바라보기. 백번 천 번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도 사실은 백번 천 번 옳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4. 왜 틀렸는지 원인 분석 – 문제 이해부족과 개념이해 부족, 계산과정 실수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

살면서 내가 저지른 크고 작은 실수들을 아들은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계속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내가 실수였다고 깨달은 순간, 자각이 시작된 것처럼 아들도 자각하려면 일단 실수를 경험해야 한다. 그것도 철저히 혼자 넘어지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봐야만 알 수 있는 인생이라는 시험문제. 어떻게든 오답을 줄여보겠다고 옆에서 아무리 애를 태워도 정답은 결국 아들이 찾아야 하고, 먼 길을 돌아서라도 기어이 찾아나서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정답일 수 있다.

다 알면서도 참견을 참기 어려운 건 왜일까. 나도 아직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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