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은 홀로 시끄럽고, 아내는 새우처럼 구부려 잠들어 있다.

“병원에서 뭐라는데.”
“염증이 심하대. 암 검사 해보자 해서 하고 왔어.”
“결과는 언제 나오는데.”...
“열흘쯤 뒤에 나온대.”

오줌을 마려워하는 꽃분이를 마당으로 내 주고 들어와 다시 누웠다. 방바닥이 따뜻하다. 며칠 전에 들여온 수탉이 홰를 치며 길게 울었다.

“그때는 병원에 같이 가보자.”
“밭일도 많은데 혼자 가지 뭐.”
“당신 몸도 자꾸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종합건강검진이라도 한번 받아보자.”
“아이구, 괜찮아. 지금 조금 아픈 건데 뭐.”

▲ 김석봉 농부

꽃분이가 현관문을 긁는다. 다시 들어온 꽃분이는 고미와 장난질이다. 늙은 바둑이는 몸에 치일세라 아내 곁으로 피하고, 청각을 잃은 행운이는 내 머리맡에서 세상모르고 잔다.

“밥통에 밥 남았나.”
“엊저녁에 많이 먹어 조금 남았을 걸. 내가 밥 안칠 테니까 그대로 좀 누워있어. 달걀 좀 찔까? 국 끓이기도 그런데...”
“좀 누워있다 내가 할 게. 냉이국 끓이지 뭐...”

창이 훤히 밝았다. 밤이 많이 짧아졌다. 경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골목을 지나간다. 회관 앞 김씨일 것이다. 닭장을 열고 모이를 주어야 한다.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밭일이 그리 많아? 왜 이리 늦게 오는데.”
“뒷두렁 물꼬랑 치는데 물이 질퍽거려 일 하기가 힘드네. 비니루도 걷어야 하고... 상추하고 쑥갓하고 모듬쌈채하고 치커리 씨 넣었다.”
“그래도 밥 때가 되면 와야지... 국 데울까?”
“라면이나 하나 끓이지 뭐. 물이나 좀 얹어주라.”
“저기 봐라. 알리움이 자꾸 난다. 수선화도 많이 올라오고...”

아내가 가리키는 꽃밭엔 많은 싹이 움을 트고 있다. 상사화는 그새 많이 자랐다. 서너개 쭈뼛쭈뼛 올라오던 알리움 싹도 열 송이 넘게 올라오고 있다. 아내는 내내 꽃밭을 손질했나보다.

흙이 덕지덕지 묻은 장화를 벗었다. 장화 속까지 흙이 들어가 양말이 흙투성이다. 덤불을 걷느라 옷에 도깨비바늘이 주렁주렁 붙었다. 따뜻한 햇살 속에 도깨비바늘을 떼고 앉았는데 집배원이 다녀간다. 우체통엔 또 무슨 고지서가 도착했나보다.

“택배 안 왔더나. 어제 전화온 약국에서...”
“아직 안 왔어요. 라면 다 끓었는데 들어와. 퍼질라.”

어제 오후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었다. 약국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서 약을 좀 보냈다고 했다. 가끔 우리 블로그에 들어와 우리 삶을 엿본다고 말하면서 필요할 것 같아 조금 보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었다. 참 훈훈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은근히 그 약을 기다렸다.

“오늘 저녁은 서하 집에서 챙겨 먹일께요. 기다리지 마세요.”
“왜? 반찬 많은데. 데리고 올라오지...”
“아녀요, 어머니 몸도 그렇고... 다시 밥상을 독립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하도 많이 컸고...”
“아니다. 우리는 서하 밥 먹는 거 보는 재미가 좋은데...”

밭을 둘러보고 들어오는데 보름이가 전화를 했다. 밥상에서 밥 먹는 손녀 서하를 보면서 쏟아내는 웃음이 하루 웃음의 전부인데 이제부터는 안 온다니 서운했다. 가끔 밥 때가 되면 내려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방금 보름이 전화 왔는데, 저녁밥은 저들끼리 해 먹는대.”
“참 나. 왜 그런대. 나는 괜찮은데.”
“한두 끼 지나고 나면 또 올라오겠지. 우리끼린데 저녁밥은 대충 먹자.”
“그러지 뭐. 택배 왔어요. 저기.”

식탁 한 쪽에 조그만 종이상자가 놓여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상자를 풀었다. 반창고부터 소화제, 근육통 젤까지 이런저런 약이 골고루 들어있다. 조그만 쪽지엔 우리 삶을 응원하는 따뜻한 글이 적혀 있다. 오늘 뿌린 쌈채소가 자라면 꼭 보내드리겠다는 문자를 적었다. 아, 이 훈훈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문득 하늘이 보고 싶어 마당으로 나왔다. 주황색으로 물든 구름 한 조각이 멀리 지리산을 넘어가고 있다.

“당신은 미투에 걸릴 거 없나.”
“내가 뭐 권력을 가진 적이 있어야지... 생긴 걸 좀 봐라.”
“정봉주, 민병두는 좀 그렇다. 인터넷에서는 뭔 말이 나오는데?”
“뭐, 다 그렇지. 이기 옳다, 저기 옳다 하는 말들이지 뭐...”

요즘처럼 굵직굵직한 뉴스가 많은 적도 없었지 싶다. 텔레비전 뉴스는 꽉 찬 것 같다. 아주 잠깐 미투를 생각한다. 찜찜한 일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술에 취해 비틀거린 젊은 날이 스쳐 지나간다. 미안함과 후회스러움을 끼고 살지만 잃을 것 없는 삶은 나름 편하다.

“내일 온다며. 여행학교에서...”
“내일 답사 온대. 그래서 내가 점심밥 해 준다고 했는데, 몸도 안 좋으면서 밥해준다 했다고 보름에게 혼났어.”
“방은 내가 정리할 게. 내일 손님 밑반찬 있으니 대충 차려. 힘든데..”
“모레부터 또 비가 온다네. 올봄엔 비가 잦다.”
“방 온도 좀 높일까? 썰렁한데...”

밖은 어둠이다. 잠시 밖으로 나왔다. 변기 물 내리는 게 아까워 오줌은 꽃밭 귀퉁이나 나무 아래에 한다. 화목보일러에 나무를 넣고 들어오는데 현관 앞에 길고양이 ‘쏘리’가 앉아있다. 지난 해 늦은 가을 쏘리가 태어날 때 새끼고양이들에게 눈병이 돌았다. 안약 넣고 가루약 먹이며 치료하느라 애를 썼지만 몇몇은 죽었고, 저 녀석은 시력을 반쯤 잃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다. 어묵이라도 한 조각 던져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텔레비전은 홀로 시끄럽고, 아내는 새우처럼 구부려 잠들어 있다. 나보다 먼저 잠든 것이 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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