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자격으로 30년 세월을 격하여 한 마디 남긴다. 두 손 모아 복창하기 바란다."

87년쯤으로 기억되니 30년 전의 일이다. 나는 지역의 어느 조그마한 언론사에서 기자노릇을 하고 있었다. 6월 항쟁에 무임승차해 언론사에도 노조 바람이 불었고 4년차 기자였던 나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 성명서를 작성했다. 그 성명서의 제목이 “우리는 촌지를 거부한다.”였다.

촌지는 관공서를 비롯한 취재원들이 기자들에게 ‘은밀히’ 내미는 봉투를 일컫는 말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어 천신만고 끝에 기자가 되고(당시에는 언론고시였다), 고통스럽던 수습기간을 통과해 드디어 출입처를 받을 때 바로 위 선배(수습기자 교육 담당)가 조용히 가르침을 주셨다. 첫 출입처는 교육 분야였다. “교육은 고급 출입처야. 경찰이나 시청 같은 지저분한 데가 아냐. 장학사님이든 학교 선생님이든 항상 공손하게 대하고. 그 분들이 촌지를 주시면 고개 숙여 고맙게 받고.”

▲ 박흥준 선임기자

한 2년쯤 나 역시 촌지를 받았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단, 명절에 기자실 간사를 맡은 선배가 나눠주는 촌지에 한해서였다. 나는 그 촌지를 가난한 학생들이 공부하던 지역의 어느 상업학교에 익명의 장학금으로 전달했다. 도무지 촌지를 받지 않으면 취재가 불가능했다. 촌지를 거부하자 기자실 멤버(기자 선배)들이 내 인사를 받지 않는 것으로 나를 자체 징계했고 주요 취재원인 공무원들도 나를 피하거나 내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던 ‘철없던 나’에게 대선배 한 분이 가르침을 주셨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명심해라. 그리고 이 돈은 내가 주는 거지 취재원이 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철없던 나’는 도무지 그런 가르침을 수긍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었다. 선배가 세탁한 돈 아닌가. 준 사람은 어쨌든 ‘영수증’을 요구할 것이고 일단 받으면 기사를 쓰는 것으로 영수증을 발급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러면 곡필이 될 것이고 나 역시 요즘 말로 ‘기레기’가 될 것이었다. “우리는 촌지를 거부한다.” 제하의 성명서는 그렇게 나왔다. 촌지를 받아야만 취재가 가능하다면,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기사는 이미 제대로 된 기사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랜 고심 끝에 벼락같이 내게 다가왔다.

기자 4년차 말단을 벗어나지 못 한 시점이었으니 선배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고 ‘의심의 짧은 기간’을 지나 ‘촌지의 달콤함’을 조금씩 알아가던 후배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워드가 없던 때여서 한 30장쯤 축소복사를 한 뒤 기자, PD, 아나운서를 찾아다니며 성명서를 각자의 취재수첩 앞장에 딱풀로 단단히 붙여줬다. 후배들에게 일갈도 했다. “이 시간 이후 촌지를 받는 놈들은 죽는다. 내가 죽인다!!!”

매우 앞서 가는 후배 한 명이 당시에도 한 명쯤은 있어서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며칠 후 조용히 찾아 온 후배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촌지는 그렇다 치고 밥이나 술은 어째야 합니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나는 잠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한 번 더 일갈했다. “그 걸 몰라서 묻냐? 가급적 그런 자리는 일단 피하고, 피하는 게 정 어려우면 다음 날 똑같은 금액으로 니가 사 임마!!! 봉급을 헐어서라도 사란 말이야.” 당시 기자에게는 회사에서 취재비라는 걸 별도로 지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촌지가 없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온갖 풍문이 내 귀에 들어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몰래 받는다느니, 다른 형태로 받는다느니, 심지어는 심야에 쌀을 한 가마니 가져와 기자의 집 앞에 부려놓았다는 소식도 접수됐다. 아나운서는 현장(필드)을 뛰지 않으니 일단 제외하고 용의자는 기자와 PD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쌀이든 돈이든 받은 놈을 죽여 버리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찾아가서 확인해도 준 놈은 입을 닫았고 받은 놈은 시치미를 떼니 방법이 없었다. 증거가 없었다.

촌지는 따라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증만 없애면 누구도 터치하지 못 한다. 죄형법정주의를 우리가 채택하고 있고 심증이 아닌 물증이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하다. 천하의 김영란법도 물증이 없으면 어쩌지 못 한다. 촌지가 계속되는 만큼 곡필아세와 속칭 ‘쪼찡기사’는 지금도 여전히 사라질 줄 모른다.

이창희 진주시장이 최근 기자실에 들러 기자들에게 폭언을 했다. 반말로 지껄이고 쌍소리를 둘러서 했다. 기자는 ‘시민의 대변자’이다. 따라서 이창희 진주시장은 시민들에게 반말을 하고 쌍소리를 지껄인 셈이다. 그런데도 기자들은 꼼짝을 못 했다. “소금 먹은 놈이 물 켠다.”고 언성을 높여 항의하지도 못 했고 이창희 시장의 '아무 말' 논리를 반박하지도 못 했다. 기자들은 그렇다면 ‘시민의 대변자’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기자를 그만둬야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해마다 수천만원씩 먹인 ‘밥값과 술값’ 영수증을 당신들이 그 날 이창희 시장에게 ‘엎드려’ 제출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신들이 기자실에서 시전했다. 영수증의 다른 이름은 ‘곤혹’과 ‘곤욕’이다. 한 번 얻어먹었으면 한 번은 사야 하는데 당신들은 이를 아직 실천하지 않고 있다.

당신들이 세간에 記者가 아닌 妓者로 불리고 代辯者가 아닌 大便者로 표기되면 당신들은 기꺼워하겠는가? 무릇 인생은 거래이다. 인사를 하면 인사를 받게 되고 인사를 한 번 받으면 언젠가는 이자까지 붙여 인사를 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밥은 없으며 그대들이 시민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한, 술이든 밥이든 갚을 능력 없으면 얻어먹지 않아야 한다. 당신들의 선배 자격으로, 30년 세월을 격하여, 짤막하게 한 마디 남긴다. 두 손 모아 복창하기 바란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촌지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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