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PC방 불가론을 역설하며

퇴근 무렵, 아들의 전화가 왔다. “엄마, 나 PC방 가면 안돼요?” 그날은 주말도 아니고 시험을 마친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목요일이었다. 잠시 침묵. 수화기 너머로 아들과의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아마도 녀석은 학원수업을 마치고 PC방 앞에서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옆에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들도 저렇게 웃고 있겠지. 화상통화가 아님에도 모든 것이 보인다. 혼자였다면 당장 안 된다고 했겠지만 친구들과 같이 있다는 게 걸렸다. 우루루 몰려가는 맛도 있을텐데 우리 아들만 소외되면 어쩌나. 일단 후퇴. “몇 시까지 올 건데?” “40분? 50분? 한판만 하고 갈게!”

녀석이 PC방에서 프로토스, 저그 따위를 붙잡고 한판 게임을 하는 동안 집에서 나는 맵을 짰다. 아들이 돌아오면 저녁을 차려주고 담판을 지어야지. PC방에서 저녁을 먹고 올까? 그럼 오자마자 세워놓고 따다다다? 흥분하지 말자. 따발총을 내려놓고 밥숟갈을 들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PC방뿐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녀석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까? PC방은 일주일에 한번, 주말에만 가는 걸로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 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풀었다 헤치며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면서 ‘평일 PC방 불가론’을 완성했다. 꽤 논리적인 엄마라고 스스로 자부하며.

아들이 PC방에 언제부터 출입하기 시작했는지는 사실 정확히 알지 못한다. 초딩 시절에도 친구들과 PC방에 갔다가 귀가시간이 늦어져서 헐레벌떡 달려왔던 때가 몇 번 있었다. 흔히 드라마에서도 나이를 불문하고 갈 곳 없는 중생들은 PC방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나. 내게 PC방은 게임마귀가 사는 어둠의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PC방은 흡사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대상이었다. 시험을 마치거나 체육대회, 혹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마지막 날, 한마디로 학원을 제껴도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PC방으로 달려갔다.

▲ 재인 초보엄마

그래서 출입을 막지는 못하고 요일을 정해두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 학원 보충수업을 마치면 2시간 정도 이용을 허락했다. 하필이면 학원 바로 옆에 PC방이 있었다. 그런데 3시간, 4시간... 게임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주말에도 학원을 가야 되냐고 투덜대던 녀석이 토요일만 되면 벌떡 일어나 밥 달라고 성화였다. 학원을 열심히 가는 이유가 설마? 그러던 차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주말도 아닌 목요일에, 굳이 PC방을 가서 평소보다 귀가시간이 1시간 이상이나 늦어지다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담판을 짓자.

삑삑. 아들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 씻고 와. 얘기 좀 하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아들이 샐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전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서서 선공을 날렸다. “아니, 평일에 PC방에 왜 간거야?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 안하니?” 던지고 보니 남편에게 자주 날리던 견제구다. 이럴 때 남편은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며 화해를 시도했었지. 그런데 아들은 훅 치고 들어왔다. “이제부턴 화요일, 목요일도 PC방에 갈 거에요” 예상치 못한 반격. “화요일, 목요일은 학원을 30분 일찍 마치니까 딱 한판만 하고 올 수 있어요” 뒷목이 뻣뻣해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아까부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목에 핏대 세우는 것도 위를 올려다보고 하자니, 자세가 너무 불편했다. 정국 전환용 카드 제시.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눈높이를 맞추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까지, 일주일에 3번이나 PC방을 간다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너는 학생이야!” 마지막 ‘학생’을 얼마나 힘주어 발음했는지. 그것은 매우 촘촘한 그물이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두 번째 반격이 들어왔다. “그럼 스트레스를 어디 가서 풀어요?” 돌발 상황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공부하고, 마치면 또 학원가고, 집에 오면 숙제하고, 그러면 나는 스트레스를 어디서 푸냐고요?”

스트레스라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마치면 집에 와서 식구들 뒤치다꺼리하고 대체 난 스트레스를 어디 가서 풀지? 언제나 그 물음표를 매단 채로 꾸역꾸역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니. 그래 너도 답답했구나.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그물에서 숨 쉴 틈이 간절했구나. 와르르. 전략이고 뭐고 모든 논리가 단박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뭐 하나는 건져야한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공을 던졌다. “그렇다고 평일에도 몇 시간씩 게임을 할 순 없잖아” “토요일엔 2시간 하고요, 화요일이나 목요일엔 40분 정도만 하고 올게요” 더 이상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너도 그 정도의 자유는 필요하겠지. 겨우 일주일에 세 번인데.

“그러면 너무 늦지 않게 40분 시간 잘 지키고, 혼자 가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꼭 친구랑 같이 가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회담 종료. 우리는 주섬주섬 일어섰다. 나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했으나 오히려 아들의 논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수밖에. 그런데 이상하게 기뻤다. 아들이 키만 큰 게 아니라 나를 설득할 만큼 내면이 성장했다는 사실에 묘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많이 컸네, 아들. 이제 어디 가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하고 살겠네. 흐뭇한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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