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임기가 시작되는 7월을 앞두고

와, 진짜, 개오진다. 공약 하나도 안 지켰다!

저녁 식탁에서 아들이 밥알을 튀기며 흥분하고 있었다. 전교 임원단이 학기 초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을 지금까지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전교 임원 선거에도 공약이 있었나? 우리 때는 공부 잘하고 잘 사는 집 애들이 하는 자리였는데. 얼마 전 신문에서 본 부산 대변초등학교의 전설이 떠올랐다. 전교 부회장이 응가스러운 교명을 바꾸겠다는 공약을 실천해서 화제가 됐었지. 시대가 변하긴 변했구나. 과연 아들의 학교에선 어떤 공약이 판세를 흔들었을까?

▲ 재인 초보엄마

첫 번째 공약은 화장실에 방향제 설치하기. 평소 조준사격 의지가 매우 빈약한 아들의 화장실 이용실태를 미루어 볼 때, 말만 들어도 지린내가 풍겨왔다. 그런 녀석들이 백 명도 넘게 들락거리는 학교 화장실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 아들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 향기로웠던 공약을 곱씹으며 뒤끝을 보이는 중이었다.

두 번째 공약은 일주일에 하루, 사복데이 지정. 교복에서 벗어나고픈 중딩들의 일탈욕구를 살짝 건드려준, 참으로 감각적인 공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학교에서 허락해줄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게 약점이었다.

세 번째는 교내에서 한 달에 한 번 스마트폰 제출하지 않기. 이거야말로 모든 중딩들의 로망이 아닐까. 손바닥 안의 우주를 아침 등교와 동시에 반납해야하는 억울함을 제대로 긁어준 숙원사업. 그러나 이 역시 실현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이 공약들이 마음에 들어 투표했는데 학기가 지나도록 이행된 것이 없다니. 아들은 배신감에 숟가락을 부르르 떨며 마지막 선택이라는 듯, 기어이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거 진짜 탄핵감 아니에요?

그, 글쎄, 아들아. 그렇다고 무슨 탄핵씩이나. 공약 좀 안 지켰다고 전교 임원을 탄핵, 뭐? 머리털 나고 그런 경우는 못봤는데?

그럼 내년에는 절대로 안찍어줄거야. 내가 끝까지 지켜볼거야.

겨우 교내에서 하는, 의례적인 선거를 두고 이렇게까지 뒤끝을 보이다니. 하지만 이것은 아들이 소심해서가 아니라 주관이 뚜렷한 거라고 해석하기로 한다. 격려도 해줘야지. 난 엄마니까.

야~ 우리 아들 덕분에 내년 선거 때는 진짜 볼 만 하겠는데? 똑바로 하라 그래. 우리 아들이 다 보고 있어. 그래도 넌 좋겠다야. 1년만 지나면 다시 뽑을 수 있잖아. 우리는 4년이나 걸리는데.

문득 지난 선거가 떠올랐다. 새로 뽑힌 일꾼들이 오는 7월부터 일을 시작할텐데. 부끄럽게도 난 기억나는 공약이 하나도 없다. 선거홍보물은 쓰레기통에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공약을 기억하는 무서운 유권자가 되기엔 애초에 글러먹었군. 아니지. 인터넷이 있었지. 검색창에 당선자 이름과 공약을 검색하자 선거 당시 후보들이 제시한 공약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올라왔다.

옳거니. 응원이든 심판이든 일단 이걸 기준으로 걸면 되겠네. 역시 IT 강국이야. 도망갈 데가 없다. 근데 무슨 공약들이 이리도 화려일색인지. 뭐든지 해주겠다고 난리다. 무슨 돈으로 저걸 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기세지만 우리가 어디 한두 번 속아보나. (개중에는 너무 황당해서 오히려 지킬까봐 겁나는 공약도 있었다.)

차라리 ‘하지 않겠다’는 공약이었으면 어땠을까. ‘자리에 앉자마자 목에 힘주지 않겠습니다. 끼리끼리 편먹고 싸우지 않겠습니다. 피같은 세금을 함부로, 막 쓰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선거도 끝난 마당에 마지막은 나의 약속으로 마무리한다. ‘먹고사니즘에 파묻혀 내가 던진 한 표의 무거움을 모른 척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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