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재판거래, 법관사찰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에 부쳐

사법농단 의혹 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대법원의 대응이 어째 처음부터 수상하다. 대법원은 마치 범죄피의자 당사자인 양 해명자료를 내놓으면서 의혹의 실체를 부인하고 나섰다. 그것도 검찰이 법원행정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한 다음날 말이다.

올 초부터 숱한 논란을 빚은 끝에 검찰 수사로 방향이 잡힌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은, 그간 사법부 내부의 의견수렴을 이유로 시간을 끌어 오다가 이번 주부터 수사가 시작됐다.

▲ 최용익 전 MBC 논설위원

대법원이 내놓은 해명자료는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적용했던 법리가, 같은 날 선고된 현대자동차 사건의 법리와 같다고 밝혔다. 즉, “케이티엑스 여승무원 판결은 현대자동차 사건과 한 묶음으로 심리돼 파견근로 관계의 새로운 법리를 선언한 판결”이라며 “이런 사건은 재판연구관실에서 심층 연구와 여러 단계 검증을 거치며, 소부에서 주심 대법관을 포함한 대법관 전원의 의견이 일치되어야만 선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케이티엑스 판결의 주심판사였던 고영한 대법관만 비판받거나 재판거래로 의심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8년 11월 케이티엑스 여승무원 34명이 한국철도공사(코레일)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과 뒤이어 다른 여승무원 115명이 추가로 낸 같은 내용의 소송은 1심에서 모두 원고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2심에서는 원고승소와 원고패소로 판결이 엇갈렸다. 대법원은 2015년 2월, 두 사건을 묶어서 한꺼번에 판결하면서, “원고 케이티엑스 승무원과 피고 한국철도공사 사이에는 묵시적 근로계약관계 뿐만 아니라 파견근로관계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로 원심에서 원고 34명 승소였던 사건을 파기환송하고, 원고 115명 패소였던 사건은 상고기각으로 원고패소를 확정했다.

대법원의 돌출적인 참고자료 배포는 케이티엑스 여승무원 사건 판결을 둘러싼 재판거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비해 미리 방어 논리를 내놓은 것이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제출하게 될 해명자료를 서둘러서 만들어 언론에 배포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김명수 대법원장이 공표했듯이 검찰이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주려면 어느 일방을 편드는 듯한 행위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

당장 케이티엑스 해고승무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기자회견을 통해 “대법원이 범죄혐의자들을 비호하는 ‘변호사’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상황에서 검찰의 수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또 제대로 된 재판이 가능할지 심각한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된 대법관 및 법원인사들의 즉각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논란 끝에 방향을 잡았지만 검찰 수사와 이어질 재판에 대한 우려는 심각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번 ‘법원 내부 의견수렴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대간 인식차’에 있다. 지난 6월 7일 대법관 후보 15명이 포함된 전국 법원장들과 미래의 대법관 후보군인 서울고법의 부장판사들이 사법농단을 파헤치는 데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전 대법원장 양승태 시절 보임된 이른바 ‘양승태 키즈’란다. 상고법원 안을 관철하기 위해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하고, 그 이전에 반골성향의 판사들에 대한 사찰 행위를 해온 의혹이 농후한 양승태가 키운 중견 법관들이 ‘사법부 개혁’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사법부의 존재근거를 부정하는 ‘문건’의 내용을 보고도 불신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도려내기보다는 ‘대법원 판결이 흔들리면 안 된다’, “대법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강변한 양승태식 논리를 추종하고 있다. 30여 년간 엘리트 코스를 밟아 정상에 도달한 법원장들의 ‘태생적 보수성’과 자신들이 사법행정권 남용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공범의식’ 등이 두루 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되는 이유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의혹만으로도 국민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은 분명하다면서 6월 15일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법원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고위 법관들 주장 대신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소장 법관들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러자 대법관 13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판 거래는 없었다’는 내용의 반박성 입장문을 내놓았다. 대법관 일동 명의로 ‘대법원 판결에 어떤 의혹도 있을 수 없다는 데 견해가 일치됐다’며 지난 2월에 이어 또다시 무고함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자신들이 내린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의혹이 있는지 없는지는 제3자들이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들이 주장하면 그대로 진리요, 무오류이니 무조건 따르라는 말인가. 이렇게 독선적인 주장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자신들의 소속 기관인 대법원 수장에 대한 명백한 ‘항명’이자 사법부에 대한 전 국민적인 불신을 외면하는 오만방자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중 6명은 해당 판결에 관여하지도 않았는데도 이 ‘반란’에 동참했다. 이들의 경거망동은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사실상 수사 방해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검찰 수사를 반대하는 이 고위 법관들은 양승태 대법원 체제의 수혜자인 동시에 상속인들이다. 소수 엘리트주의로 똘똘 뭉친 사법부는 견제 받지 않는 강력한 권력집단이 되어 버렸다. 사회적 약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재벌과 권력자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판결을 해도, ‘자기들만의 사법부 독립’을 주장하면서 무소불위의 특권을 당연한 듯이 누린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재판 거래와 법관 사찰 의혹에 대한 실체적 진실 규명이다. 그러나 고위 법관들의 주장과 달리 공개된 문건만 봐도 거래의혹의 ‘근거’는 한둘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려 했다는 16개 판결뿐 아니라 ‘청와대와 물밑에서 조율해왔다’는 양승태 대법원 스스로의 고백은 분명하게 문건으로 남아 있다. 1, 2심에서는 승소했다가도 대법원에만 올라가면 파기환송, 또는 기각되는 판결들 때문에 케이티엑스 해고승무원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과거사 피해자들은 배상은커녕 빚더미에 올라야 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도 생활고 끝에 잇따라 목숨을 끊어야 했고, 밀양 송전탑 주민들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주민들도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을 견뎌야 했다.

이제 공은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은 철저한 수사를 통해 특별조사단이 조사한 400여 개의 파일들만이 아니라, 법원행정처에 의해 삭제된 2만 4천여 개의 파일도 모두 복구해 이번 사태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야 할 것이다. 이미 전직 대통령 두 명이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전직 대법관이나 대법원장도 성역이나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권과 사회정의의 보루’로서의 사법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은 그 다음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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