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ad35

[6월 항쟁, 그때 그 사람들] 인터뷰- 경상대 언더세력 대표 진홍근 씨

기사승인 2018.06.21  17:35:16

공유
default_news_ad1

-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대중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청년을 닮은 6월은 푸르고 뜨겁다. 31년 전인 1987년 경남 진주는 오늘보다 좀 더 뜨거웠다. 경상대 학생들을 필두로 한 6월 민주항쟁 때문이었다.

6월 항쟁은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직접 선거’를 달성케 한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지금이야 시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우리를 대리할 정치인들을 선출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는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았고, 1987년 이 같은 내용이 깃든 헌법을 수호할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6월 경남 진주를 비롯한 전국의 시민들은 시민들에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며 일어났다. 6월 민주화 항쟁이다.

<단디뉴스>는 21일 1987년 당시 경상대학교에서 일어난 6월항쟁을 주도한 ‘언더’세력의 대표 진홍근 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학생 운동권에서 ‘언더(Under)’세력이란 대외적으로 노출된 학생 운동 세력이 아닌 배후에서 조직을 구성하고 시위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지휘부를 의미한다. 

 

▲ 6월 항쟁 당시 경상대학교 학생운동 '언더권'의 대표 격이었던 진홍근 씨

- 경상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했다고?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뭔가? 

“일찍부터 이런 저런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 때 이런 저런 걸 이해하고 있다가 대학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한 공부들을 하며 자연스레 학생운동을 하게 됐다.”

- 1987년 6월 항쟁 때 학생 운동권의 ‘언더’세력 대표로 활동했다고 들었다.

“언더세력 대표라고 할 건 없다. 민주주의 운동을 꾸리는 여러 방식이 있다. 당 조직이 있으면 우위를 가진다. 하지만 당 조직이 없으면 그 전 단계로 여러 가지 소규모 조직이 짜인다. 여기서 하달되는 지침에 따라 여러 단체들이 움직인다.”

- 당시 진주에서는 동아리(써클) 수준으로 언더 활동이 진행됐지 않나?

“써클도 하나의 대중조직이라고 보면 된다. 대중조직이 주위에 포진되고 그 대중조직을 장악하는 지휘부 정도랄까?”

- 6월 항쟁 당시 전국적 시위가 주춤할 때 그것을 다시 끌어 올린 게 경상대학교였다고 들었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이 끝났을 때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전면에 나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그 시절의 대학생들은 목표가 좀 달랐다. 물론 지금과 같은 사회를 바란 건 아니다. 좀 더 철저한 민주주의, 대중 중심의 민주주의를 바랐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소수 기득권자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결국 기득권을 쥔 사람들, 심지어 일제 강점기 친일세력까지도 그 기득권에 들어간다. 이들을 청산하고 대중 민주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 1987년 6월10일 경상대학교 운동권 100여 명이 마산에 갔다. 30명은 진주로 복귀해 진주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그때는 어디에 계셨나?

“그 날 시위 설계를 내가 했다. 마산에 넘어갈 때 조를 짜서 넘겨 보냈다. 그 이전에도 6월을 목표로 여러 번 시위를 했다. 5월 마산 남성동 성당에서도 시위를 했고. 초기에는 우리 쪽 힘이 많이 부대껴서 가두시위, 그러니까 홍보전을 했다. 옛날 말로 하면 의식화 조직화 전력화라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문제를 알리는 거다. 문제를 알리려면 조직이 필요하고, 그 조직이 실질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걸 전력화라고 한다. 정권의 하수인이던 당시 경찰들을 뚫으려면 이러한 훈련들이 꼭 필요했다. 그 세력이 100여 명 정도였다. 6월 9일에 마산에 넘어가 그 쪽 대학생들과 연대했다.”

- 조직화가 잘 됐던 모양이다. 6월 12일 경상대학교 민주광장에 약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호헌철폐와 대학민주화를 위한 개척인 전진대회’를 열었다.

“훈련된 부대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잘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잘 돼 있었다고 보면 된다. 5월18일이나 4월19일 같은 날들이 학생 운동의 디데이가 되곤 했다. 1987년 5월18일과 19일에 학교 앞에서 시위를 했고 20일에도 한 번 더 시위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6월을 목표로 연속 시위를 하면서 훈련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4월19일에는 농성전을 준비했다.”

- 경상대학교에서 6월 항쟁 시위가 어떻게 확산됐는지 궁금하다.

“4.19혁명 이후로 학생 운동을 비롯해 사회운동의 흐름이 계속 이어져 왔다. 박정희 정권, 독재 정권이라고 해야 할까. 이들은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와야 한다는 헌법 내용을 무시했다. 쿠데타 정권이지 않나. 그 과정에서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다. 반정부 민주주의 운동.”

 

▲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했다는 조선일보의 당시 보도

- 1987년 6월17일 경상대 학생들이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다 LPG 수송 차량을 탈취한 바 있다. 이게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의 1면에 실리기도 했었던 걸로 아는데.

“그 사건은 계획된 게 아니었다. 시위를 한다는 것은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기존의 체제를 흔드는 것이다. 그 교란의 하나로 고속도로를 점거할 계획을 짰다. 고속도로를 지나던 LPG차량을 탈취한 건 당시 현장에 있던 친구들이었다. 그 날 보고가 올라왔다. 차량을 탈취했다고. 그래서 그걸 가지고 학교 정문 앞으로 오라고 했다.”

- 당시 LPG차량 위에 올라 횃불을 들기도 했던 걸로 안다. 상당히 위험한 광경이지 않나?

“그 때는 터질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 시위대 속에서 ‘죽자’는 이야기도 나왔었다고?

“누가 선창을 주도한 건 아니다. 자연스레 나왔다. 비장했던 것 같다. 위험하니까 시위를 접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바라는 걸 위해 더 나아가야 할 것인가 중 사람들이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 전국의 6월 항쟁 과정 전체를 돌아봐도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최고로 위험했다. 뉴욕타임스인가에도 실린 걸로 들었다.”

- 전국 단위로 보면 경상대는 외지에 있는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치열한 시위가 일어났다.

“몇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주는 혁명적 전통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3대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 전투의 김시민 장군도 생각할 수 있고, 1860년대 농민항쟁, 또 1920년대 형평운동이 있다. 농민항쟁은 동학운동보다도 빨랐다. 동학이 일어났을 때 고부에서 상당히 먼 진주에서 세력이 빠르게 조직되기도 했다. 3.1운동 때도 진주는 강렬하게 일어났다. 6월 항쟁 당시의 모습과 유사하다.”

 

▲ 경상대학생들이 LPG차량을 탈취했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

- 1987년 6월27일 경찰에 체포됐다.

“27일인가 28일인가 잡혔는데 잡혀가니 안기부 사람들이 나와 있더라. 어용분자라고 했다. 지나가다가 시위에 가담했다고. 그랬더니 제일병원 앞에서 연설했던 내용을 다 녹음해놨더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당시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시청을 접수해야 한다. 당시만 해도 시청은 주민들이 선택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군부 통치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었다. 또 지역 3권이라 하지 않나. 입법, 행정, 사법. 당시에는 지역 내 입법기관이 없었다. 그래서 행정부인 시청, 사법부인 법원을 점거해야 한다고 봤다. 그 때만 해도 시청과 시민이 따로 놀았다. 우리가 시청을 점거해도 충분히 행정을 펼 수 있다고 봤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법도 마찬가지라 여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일로 잡혀가곤 했다. 그래서 교도소를 장악해 흉악범을 뺀 사람들은 석방하겠다고 했다. 안기부 직원들이 이러한 연설 내용을 언급하며 네가 유명한 사람인 건 아는데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그런 식의 연설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웃음). 그 당시에는 그래도 그게 내 목표였다.”

- 두렵지 않았나?

“잡혔을 때 결심을 했다. 만약 여기서 군대가 치고 나오면 나는 죽는 거고 유화조치가 떨어지면 살아나는 걸로 봤다. 뉴스를 보고자 했는데 안 보여주더라. 힘들었다. 생명을 걸고 달려드니 뉴스를 보라고 하더라. 올 때까지 온 것 같더라. 29일 호헌철폐 선언이 나왔다. 살았다고 생각했다. 잘 안 됐으면 당시 갇혀 있던 진주경찰서 3층 화장실 쪽으로 도망치려고 생각했다.”

- 89년도에 유죄를 받기도 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 국가보안법도 찬양죄라든지 여러 가지가 항목이 있다.

“사기라고 보는데 내 죄목은 ‘남도주체사상연구회 회장’이었다. 나는 그런 걸 조직한 적이 없다. 그런데 수사당국은 확신을 했다고 한다. 당시 진주신문 앞에 ‘김일성 만세’ 이러한 플래카드가 붙었다. 의과대 정문 앞에도 붙었다. 내가 자주가던 서민련에도 이상한 편지가 왔다. 필체를 숨기려고 했는지 '선데이서울' 이런 곳에서 문자 하나하나를 오려 붙인 편지. 충성 서약 뭐 이런 거였다. 그때 고생 좀 했다. 이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여러 번 잡혀갔는데 증거 불충분 등으로 풀려났다. 내가 선량하기도 했으니까(웃음)”

- 형은 어떻게 받았나?

“구속돼 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자기들이 증거라고 내놓은 건 책 두 권이 전부다. 출판사에서 나온 거”

- 마르크스 평전이라든지 이런 종류의 책이었나?

“그 비슷한 거다.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책이었고. 조사 내용은 많더라. 그런데 조작된 내용이다.”

- 구속된 상황에서 고문이나 폭행은 없었나?

“들어갈 때 많이 당했다. ‘비녀꽂기’라고 모를 거다. 인터넷 찾아보면 많이 나온다(웃음). 그래서 무릎이 좀 안 좋다”

- 경찰이 고문을 했나. 아니면 안기부가?

“진주경찰서도 지하가 있었다. 안기부 사람들도 따로 오고...”

 

▲ 경상대학교 학생들이 6월 항쟁 당시 구 진주시청 앞에서 시위를 펼치고 있다.

- 경상대학교 의과대 83학번이다. 제적은 89년에 당하신 건가?

“맞다. 잡혀갈 때”

- 복학은 안 하셨다.

“김영삼 정부 때 사면복권됐다. 후배들이 20여 명 왔더라. 후배들만 복학시키고 나는 복학 안 했다.”

- 복학 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나? 이후에는 무엇을 하셨나?

“후회 안 한다. 이후에는 계속 현장에 있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형식적 민주주의는 갖춰졌다. 하지만 이건 대중적 민주주의는 아니다. 결국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우위를 점하는 민주주의다. 변할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봤고, 내가 할 일은 이제 없다고 판단했다.”

- 생업은 어떻게?

“나를 챙겨줄 만한 사람들한테 의탁해 술만 먹고 살았다.”

-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선정되거나 하지는 않았나?

“거절했다. 친구가 또 한 번 잡혀가서 신원보증을 서러 간 적이 있다. 갔더니 진주경찰서 정보과 젊은 형사 두 명이 나왔더라. 서명하라길래 서명했더니 진홍근 선생이냐고 묻더라. 선생은 아니고 진홍근은 맞다고 하니, 왜 민주화운동 유공자 신청을 안 하냐고 묻더라. 의아하다고. 나는 죄질이 안 좋고 그걸 받을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건 언제쯤인가?

“최소한 김대중 정부 들어서고 나서인 것 같다. 1997년쯤 될까?”

- 요즘에는 예전처럼 학생운동이 뜨겁지 않다. 학생들의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도 않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성립이 됐으니 문이 어느 정도 열렸다고 본다. 학생들도 이제 자기 기회를 찾아 가야한다. 일단 열려 있잖아. 자기 길을 가야 한다. 사회적 문제보다 개인적 문제를 먼저 처리하려고도 하는 것 같다. 지금 청년들이 힘들지 않나. 또 지금 대통령을 봐라. 그런 사람을 두고 청년들이 물러나라 할 건 아니지 않나.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부분적인 문제가 있다. 예상했던 모습인데 아쉬움이 있다.”

- 정치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

“한 번도 없다. 예전에 감옥에 있을 때 김대중 씨 측근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민주주의가 내가 원하는 만큼 달성되면 의과대로 돌아가려고 했다.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었으면 나서지도 않았다.”

- 그런데 의과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후배들 의견을 따른 거다. 만장일치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 후배들은 왜 그런 의견을 낸 건가?

“사람을 고치는 의사()보다 옳은 의자의 의사(士)로 남는 게 선배에게 바라는 거라고 했다. 바른 선배의 표상이 그런 거라고(웃음)”

-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갔으면 하나?

“대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 우리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자주적 외교를 펼 수 있는 나라, 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통일은 우리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지금 섬 아닌 섬이지 않나. 분단이 평화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다. 인구도 국토도 2배 이상늘어난다. 통일이 되면 태평양 국가들과 유럽을 연결하는 허브가 될 수도 있다.”

- 남북정상회담 등이 펼쳐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보나?

“좋게 본다.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일제가 물러간 상황과 비슷하다.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문제가 된다. 지방선거 결과를 보더라도 그렇다. 생각보다 괜찮은 영웅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정치권에 들어온 사람들이 비판받을 건 받고 칭찬받을 건 받으면서 자리 잡아가야 한다.”

김순종 기자 how2how2live@daum.net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