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에 ‘탄력근무 6개월’은 52시간을 하지 말자는 얘기.

노동은 일단 힘들다. 근육을 써야 하고 머리도 써야 한다. 단순노무직도 마찬가지이다. 하다못해 망치질 하나에도 망치의 무게와 손잡이의 길이를 감안하는 머리가 필요하고, 타점을 정확히 계산해야 하며, 내려치는 각도도 치밀하게 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위는 깨지기는커녕 단단한 가슴으로 망치를 튕겨 보냄으로써 노동을 무위로 돌린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노동과정에서도 근육과 머리를 함께 쓴다. 근육과 머리를 함께 쓰느라 모두들 힘들 때 근육도 최소한으로 움직이고 머리는 아예 멈춘 일군의 무리가 있어서 허리둘레를 늘리고 뱃살을 찌운다. 그 따위 뱃살을 빼고 허리를 줄이느라 고생하는 게 그들이다. 그것도 노동이라면 노동은 일단 힘들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세상은 노동이 만들었다. 노동 없이는 되는 게 없다. 농민이 쌀을 생산하지 않으면 모두들 굶고 뼈만 남았다가 서서히 숨을 거둔다. 노동자가 물건을 만들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노동을 멈추면 그들은 숨을 멈춘다. 몸이 죽으면 기생충도 따라 죽는 게 철칙이다. 지긋지긋한 암세포도 함께 죽는다. 문제는 기생충들이, 암세포들이 그들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데 있다. 확신이 의심으로 바뀌고 의심이 뒤늦은 확신으로 재탄생하는 건 순간의 일인데 그들만 그걸 모른다. 노동은 자부심이다. 노동이 세상을 만들었다.

▲ 박흥준

수렵과 채집의 시대에는 근대적 의미의 노동개념(자본과 대비되는)이 없었다. 배고프면 따먹고 최소한으로 잡아먹으면 되었다. 세상천지에 먹을 게 널려 있으니 착취도 없었다. 과하지도 않았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자연이 우리를 먹이고 자연이 우리의 새끼들을 기르던 그 시절, 먹으려고 약간의 근육을 움직이고 머리를 조금만 쓰는 건 노동이 아니었다. 숨쉬기를 노동이라 할 수 있는가, 손을 뻗쳐 과일을 따고 과육을 씹는 게 노동인가. 잉여농산물이 생기고 계급이 발생하고 착취가 시작되면서 노동은 노동이라는 개념을 부여받았다. 괴로움도 그 때 시작됐다. '에덴'이 물러가고 ‘불 타는 헬레나’에 내쳐진 아담과 하와는 서로 부둥켜안고 끝없는 노동으로 그 괴로움의 시간을 견뎌냈다. 헬레나는 지금도 불 타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지금도 죽지 않고 있다.

자부심 이전에 부끄러움이 먼저 왔다. 요즘 세상만 해도 그렇다. 뼈 빠지게 노동하는데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래야 대궁밥이라도 먹는다. 나는 굶어도 애새끼는 먹여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때리면 맞아야 한다. 열심히 일한 죄로 구조조정을 당하고 실업급여 3개월 치라도 받으려면 부끄럽게도 자발적 실업이 아니라는 걸 그들의 자비에 의존해 증명해야 하고 다른 소득이 절대 없음을 부끄럽게 설명하면서 또 한 번 고개를 숙여야 한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은 부끄러움이다. 짤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내가 부끄럽고 고개를 숙인 댓가로 밥을 먹는 애새끼들이 부끄럽고 쌀 한 말의 월 노동에, 한 푼 못 받는 산림녹화 부역에 항의 한 번 못했던, 돌아가신 아버님이 부끄럽다.

그래도 노동은 해야 한다. 노동과 자본으로 나뉜 세상. ‘생활’이 아닌 ‘생존’이 노동에서 나온다. 목숨을 이으려면 노동을 해야 한다. 주는 대로 받아야 하고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퇴근을 늦추라면 늦추고, 나오지 말라면 나오지 않고, 다시 나오라면 50% 깎인 임금에라도 나가야 한다. ‘생존’을 ‘생활’로 바꾸는 출발점이 바로 ‘연장근로 포함 주 52시간’이다. 40시간이 현재 형식적으로라도 시행되고 있으니 연장근로는 주당 12시간으로 제한해 52시간을 맞추려는 것인데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 때와 똑같은 일들이 이번에도 시끄럽게 진행되고 있다. 주 52시간도 모자라 탄력근무제라는 꼼수가 나오고 법 위반 단속을 6개월 늦추었으며 급기야는 여당의 홍모 씨가 탄력근무시한을 6개월로 하자는 망발을 했다. 알고 보니 자유당의 홍모 씨만 망발을 하는 게 아니었다. 홍모 씨는 다음 총선에서 합당하게 응징하자.

엄밀히 따져보자. 우리가 그들에게 파는 건 노동력(ability, potential)이지 노동(work)이 아니다. 노동력은 24시간 빼내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기계도 잠시 쉬어야 하고 승용차도 고속도로를 달리다 1시간 단위로는 엔진을 꺼줘야 한다. 하물며 인간이야.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근로기준법이 그래서 나왔고, 근로계약서가 그래서 중요하고, 법이 지켜지지 않으니 전태일이라는 예수가 나왔다. 전태일 예수는 지금도 계속 나온다. 왜? 지금도 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 이 땅의 하루 8시간은 노동절의 산실 시카고에서 수천 노동자가 일제히 피를 흘린 뒤 백여 년이 지나서야 정립됐다. 주당 40시간은 전태일 이후 5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52시간 논쟁에 어이없이 희롱당하며 지금도 헤매고 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은 존중되어야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가 바로 ‘노동존중’이다.

‘주 52시간’에 ‘탄력근무 6개월’은 52시간을 하지 말자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그냥 노동자를 죽이는 일이다. 6개월 뒤에는 그럼 어찌 할 것인가. 기계를 세울 것인가. 인력 충원을 하지 않으려는 꼼수가, 조금이라도 적게 줌으로써 이윤을 늘리려는 나쁜 짓이 6개월이라는 숫자에 숨겨 있다. 조선조에도 그런 노동은 없었다. 노동자의 당시 이름, 노비는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 출산휴가 100일을 보장받았다. 그로부터 세기가 6번이나 바뀐 지금 이 땅에서는 노동시간을 계산하며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협박도 한다. ‘주 52시간’을 하면 임금이 줄어든다는 협박인데 노동의 가치를 반영하지 않는 임금(기본급)은 임금이 아니다. 그냥 먹이에 불과하지. 연장근로를 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생계도 이을 수 없는 세상을 이제는 고치자는 것인데 '먹는 것'으로 협박을 하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이 달 들어 일부 중소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 부족 사태는 원인(저임금, 대기업의 갑질에 따른 지급능력 부족)에 대한 고찰과 해결방안(갑질 근절)이 도외시된 채 ‘주 52시간’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사례로 과대포장돼 세간에 퍼지고 있다. 노동시간 계산을 당장 멈추라. 협박도 멈추라. 탄력근무시한 연장을 외치는 그 더러운 입을 즉시 다물라.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은 정의(正義)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문재인의 노동존중’이 최소한의 의미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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