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문화연구소 주최 진주 문화기행

▲ 진주 옛 건축의 자취를 찾아서

 

에어컨 밑의 피서만을 꿈꾸게 하는 요즘이다. 잦은 비와 맞물려 더운 날씨는 기분마저 축축하게 만든다.

▲ 진주성 촉석문

지난 6월 17일 진주문화연구소에서 마련한 ‘진주 옛 건축의 자취를 찾아서’ 문화기행에서 고영훈 경상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와 함께한 기억을 정리하며 역사를 품은 시간을 떠올리는 기억은 시원하게 젖게한다.

 

▲ 진주성 촉석문은 성벽에 문을 내고 그 위에 문을 지키는 망루를 둔 성벽 구조체 육축을 쌓고 무지개 모양의 아치인 홍예로 출입구를 낸 다락 건물이다.

 

이날 진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진주성에 모였다. 촉석문에 모여 진주성(촉석문->촉석루->영남포정사->북장대->공북문)을 시작으로 용산사(용호정원), 광제서원, 청곡사, 지수면 청원리 이씨 고가를 둘러보았다.

 

성 위에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향한 왜적을 향해 포기하지 않지 않고 지키려 했던 이들의 마음이 깃발에 나부낀다. 바람을 따라 역사가 펄럭이는 속으로 들어갔다.

 

▲ 현재의 진주성은 1604년(선조 37) 병사 이수일이 경상우병영을 성안으로 옮기며 성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며 서쪽 안으로 들여쌓고 안성도 쌓아 지금에 이른다. 진주문화연구소에서 마련한 ‘진주 옛 건축의 자취를 찾아서’ 문화기행 길라잡이 고영훈 경상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시인 변영로의 논개 시비를 지나 용 두 마리가 뒤엉킨 그림 사이로 성문을 들어가자 장렬했던 역사가 알알이 맺힌다. 1972년 복원한 촉석문은 성벽에 문을 내고 그 위에 문을 지키는 망루를 둔 성벽 구조체 육축을 쌓고 무지개 모양의 아치인 홍예로 출입구를 낸 다락 건물이다.

 

진주성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성이었으나 바깥성은 자취를 찾기 어려워

 

▲ 진주성 촉석루

 

현재의 진주성은 1604년(선조 37) 병사 이수일이 경상우병영을 성안으로 옮기며 성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며 서쪽 안으로 들여쌓고 안성도 쌓아 지금에 이른다. 이로써 진주성은 촉석루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진주성 공원 일대의 안성과 성내동 주변의 바깥 성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병사 남이홍이 성을 고쳐 지으며 손보며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 진주성 촉석루가 한국전쟁 때 파괴되기 전에는 크고 넓은 바위 위에 주춧돌 없이, 또는 낮은 자연석으로 된 주춧돌 위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잘 다듬은 화강암에 둥근 주춧돌로 바뀌었다.

 

앞면 다섯 칸, 옆면 네 칸 규모의 팔작지붕인 촉석루에 들렀다. 한국전쟁 때 파괴되기 전에는 크고 넓은 바위 위에 주춧돌 없이, 또는 낮은 자연석으로 된 주춧돌 위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잘 다듬은 화강암에 둥근 주춧돌로 바뀌었다. 2층의 다락 마루는 옛날보다 더 높이고 다락 아래 기둥은 나무에서 둥긴 돌기둥으로 바뀌었다.

 

▲ 진주성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

 

누각에 올랐다.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모두 청남 오제붕이 쓴 ‘영남제일표상’이라 적힌 현판 아래에 모였다.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다시 중보와 종보를 올려 도리가 일곱 개인 7량 가구에 공포를 삼익공 형식으로 구성해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인 지붕 가구를 살폈다.

 

▲ ‘진주난봉가’를 떠올리게 하는 진주성 우물가

 

촉석루를 나와 영남포정사로 향하다 우물가에서 멈췄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애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실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가니 산도 좋고 물도~’로 시작해 ‘사랑 사랑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벌 나비 되어 남녀차별 없는 곳에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로 끝나는 ‘진주난봉가’가 절로 떠오른다.

 

▲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

 

일행은 언덕을 따라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로 걸음을 옮겼다. 영남포정사는 망미루(望美樓)라고 불리다 1896년(고종 33) 경상남도관찰사 청사 정문이 되었다.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 정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2층 누각이다. 다락마루를 쓰기보다는 위엄있게 보이려 만든 까닭에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다. 난간 일부를 없애 사다리를 걸쳐 보수 등을 위해 오르도록 했다.

▲ 진주성 북장대는 진남루라 불린다. 남쪽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그날의 다짐이 들린다.

 

영남포정사를 지나 경절사를 지나 진주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진주 시내에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장대에 올랐다. 장수들의 지휘소였던 북장대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높게 축대를 쌓은 누각은 닭벼슬 모양의 난간을 둘렀다. 대들보 좌우에 용머리 조각을 붙였다. 진남루라 불린다. 남쪽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그날의 다짐이 들린다.

 

▲ 진주성 공북문

 

북장대를 내려와 공북문으로 향했다. 먼저 성벽을 중건하고 난 뒤 따로 문을 건립하면서 성벽과 문이 따로 노는 듯한 이질감을 드러낸다. 현재는 진주성의 북문이면서도 정문 노릇을 한다. 공북(拱北)은 신하가 임금이 있는 서울(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리는 뜻이다. 위엄을 갖추기 위해 다른 문보다 2층 누각으로 높게 이뤄있다.

 

약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선비 정신(노블레스 오블리주)을 실천한

용산사와 용호정원

 

▲ 진주 명석면에 있는 용산사

 

성을 나온 일행은 명석면 용산사로 향했다. 절 입구에 있는 반야교(般若橋)를 건넜다.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지혜의 바다로 가는 기분이다. 가파른 길 끝에는 얼핏 여느 가정집처럼 보이는 절이 나왔다.

 

▲ 진주 명석면에 있는 용산사 대웅전

 

대웅전 앞 안내판에는 “1926년 진주 거부(巨富) 박헌경(朴憲慶)이 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사재를 들여 세웠다”라고 적혀 있다. 실제는 박헌경 선생이 자신의 경작지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세운 별장이었다. 별장이었던 곳이 절로 바뀐 까닭에 기존의 불전과 달리 누각과 정자 건축요소와 근대의 주택풍 불전인 대방(大房)이 결합한 독특한 모양새로 남는다. 온돌이 대웅전에 깔린 까닭이다.

 

▲ 진주 명석면에 있는 용산사 대웅전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보인다.

 

대웅전에 서자 지리산 천왕봉이 와락 껴안는다. 빛바랜 벽화 속에서 구름을 타며 훨훨 춤을 추는 무동이 고개 든 나를 내려다본다.

 

▲ 진주 명석면에 있는 용호정원

 

용산사를 내려와 용호정원으로 향했다. 용호정원은 1922년 당시 거듭되는 재해로 많은 사람이 굶주리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박헌경 선생이 재산을 털어 중국 쓰촨성(四川城) 동쪽에 있는 무산(巫山) 수봉(秀奉)을 본떠 만든 공원이다.

 

600여 평 규모의 원형 연못인 용호지(龍湖池)가 있고 연못 주위에는 고분을 연상하게 작은 산봉우리 12개가 있는데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든 12개의 가산(假山)이다. 수련이 심어진 연못 속에는 팔각정자인 용호정(龍湖亭)이 세워져 있다.

 

용호정원은 담장도 없어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연못에는 정자까지 줄로 연결된 작은 배 하나가 묶여 있다. 줄을 당기면 배를 타고 용호정에 오를 수 있다.

 

▲ 진주 명석면 광제서원

 

인근에서 점심을 먹은 뒤 우는 돌, 명석(鳴石)이라는 유래를 간직한 자웅석(雌雄石)에 못 미쳐 남양 홍씨 재실로 사용하는 광제서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진주 유일의 국보를 품은 청곡사는 야단법석의 중심지

 

▲ 진주 명석면에 있는 광제서원은 음력 3월 10일 고려 은청광록대부 상서 홍의(洪毅)와 고려 금자광록대부 수상공상서 보문각, 태학사 홍관(洪灌)에게 춘향(春享)을 올린다.

 

서원은 처음에는 홍복사(洪福祠)였으나 1747년 홍지암(洪池庵)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891년 중수하면서 모원재(慕遠齋)로 개칭하여 남양 홍씨 문중의 재실로 사용해왔다. 1976년 영남 유림이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켜 해마다 음력 3월 10일 고려 은청광록대부 상서 홍의(洪毅)와 고려 금자광록대부 수상공상서 보문각, 태학사 홍관(洪灌)에게 춘향(春享)을 올린다. 목조건물은 고려 초기의 건축 형태를 잘 보여 준다.

 

▲ 진주 금산면 청곡사 학영지

 

광제서원을 나와 달빛이 산을 타고 왔다 해서 달 오름산(달음산) 또는 달엄산 불리는 월아산이 품은 청곡사(靑谷寺)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절을 찾아가는 길은 아담한 숲길이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에 이르기 전에 걸음을 붙잡는 풍경이 하나 있다. 세월을 켜켜이 견디어온 소나무가 ‘학영지’라는 연못에 뿌리내린 채 반긴다. 연못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청곡사 아랫마을에 살았다는 신덕왕후는 어릴 적 달 밝은 밤이면 거울 보듯 이 연못에 자신을 비춰보기를 즐겼다고 한다. 찾았을 때는 연못이 가물어 바닥을 훤하게 드러내 풍치를 느끼기 어려웠다.

 

▲ 진주 금산면 청곡사

 

일주문 들어서자 왼편으로 부도(浮屠)가 보인다. 절이 차츰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방학교(訪鶴橋)를 건넜다. 신라 헌강왕 5년(872년) 도선국사가 진주 남강에서 푸른 학 이곳 월아산 기슭으로 날아와 앉자 성스러운 기운이 충만한 산과 계곡이 있어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라 절터를 세웠다고 한다.

 

▲ 진주 금산면 청곡사 대웅전

 

청곡사는 872년 창건된 후 고려 우왕 6년(1380년) 중수했다가 조선 태조 6년(1397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풍수지리에 따른 비보사찰(裨補寺刹)로 고쳐 지어졌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다가 선조 35년(1602년) 다시 지어졌다. 6·25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금 고쳐 지어졌다.

 

▲ 진주 금산면 청곡사 대웅전 측면에서 보면 띠살문 창살 오른쪽 아래에 작은 창살이 지나온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만은 광해군 4년((1611년) 이후 한 번도 해체, 복원된 적이 없는 오래된 목조 건물로 경남 유형문화재 51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측면에서 보면 띠살문 창살 오른쪽 아래에 작은 창살이 지나온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 진주 금산면 청곡사 업경대 입구에 선 금강역사상가 내 지난 잘못을 심판하려는 듯 곽 쥔 주먹으로 내리 치려 해 움찔했다.

 

사람이 죽으면 전생의 업이 거울을 보는 듯 드러나 업에 따라 벌 받는다는 업경대 입구에서 선 금강역사상가 내 지난 잘못을 심판하려는 듯 곽 쥔 주먹으로 내리 치려 해 움찔했다.

 

범종각 옆으로 불교문화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지하 3층까지 내려가야 그 모습을 다 드러내는 무게만 114kg인 초대형 괘불이 있다. 길이 10.4m, 폭 6.4m인 청곡사 영산회쾌불탱화는 진주 유일의 국보다. 아쉽게도 내부 수리 중이라 문이 닫혀 있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청원리 이씨고가

 

▲ 진주 지수면 청원리 이씨고가

 

청곡사를 나와 남해고속도로에 올랐다. 지수나들목을 빠져나와 지수중학교 쪽으로 향했다. 조선 고종 17년(1880)에 청호공이 지은 청원리 이씨고가를 찾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일자형(一字形)으로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었다. 사랑채를 중심으로 헛간과 대문채 등이 口자형(字形)으로 놓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전형적인 남부 부농 민가라고 한다.

 

▲ 진주 지수면 청원리 이씨고가 마당 가득 덮은 달걀부침을 닮은 개망초

 

마당 가득 덮은 달걀부침을 닮은 개망초를 뒤로하고 인근에 있는 청계 이세후 종가로 걸음을 옮겼다. 종가는 살림집 부분과 재실, 가묘의 2부분이 서로 담장으로 구분되고 있다. 살림집은 1836년에 건립된 안채와 1853년에 지은 사랑채, 방앗간채, 광채 그리고 대문채로 꾸며져 있다,

 

▲ 진주 지수면 청원리 돌담길

 

100여 년 전에 세운 가묘(家廟)는 재령 이씨 조상의 신위를 모셨다. 계상정(溪上亭)은 1750년경 청원리 앞들에 세운 것을 1902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으로 홑처마에 합각지붕 형식인데 조선 후기 건축의 고풍스러운 맛이 있다.

 

▲ 진주 지수면 청원리 청계 이세후 종가

 

임간정(臨澗亭)은 120여 년 전 청원리 앞들의 하천 옆에 있던 것을 1935년 이곳으로 옮겼다. 만수정은 1940년 지은 건물이다. 수당서실은 1942년에 건립한 서실이다.

 

▲ 진주 지수면 청원리 청계 이세후 종가에서 ‘진주 옛 건축’ 길라잡이에 나선 경상대학교 건축학과 고영훈 교수는 “진주의 옛 건축은 곧 진주라는 울타리 안에서 선조들이 쌓아온 역사, 덥고 추운 기후, 다도해와 가까우면서 지리산과 남강을 끼고 있는 자연환경, 이 지역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의 공통 기억들”이라며 고건축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했다.

 

“진주의 옛 건축은 곧 진주라는 울타리 안에서 선조들이 쌓아온 역사, 덥고 추운 기후, 다도해와 가까우면서 지리산과 남강을 끼고 있는 자연환경, 이 지역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의 공통 기억들”

 

이라는 고영훈 교수의 말씀이 아직도 귀가에 쟁쟁하다. 역사와 미래가 만난 사적지를 둘러본 하루였다. 공간에 담긴 역사를 들었다.

 

※ 자료 도움: 경상대학교 건축학과 고영훈 교수가 쓴 <조선 시대 우도 문화권의 중심지 진주의 옛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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