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이라는 단어조차 없는 세상. 어디 없을까.

‘최저임금’이라는 단어조차 없는 세상. 어디 없을까. 노동자와 사용자가 알아서 임금을 결정하는 세상. 노동자가 부르는 값에 “그거 받아서 살겠느냐”며, 노동자의 마음 씀씀이에 미안해하며 임금을 더 올려주려 애쓰는 사용자는 어디 없을까. 사용자가 부르는 값에 “그렇게 많이 주면 회사가 굴러가겠냐”며 손사래를 치는 노동자는 어디 없을까. 최저임금을 시행하는 이웃 나라를 비웃으며 ‘노동’과 ‘자본’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하는 일인데 그렇게 법에만 의지해서야 인생살이 팍팍해서 살맛이 나겠냐고 되묻는 노동자와 사용자, 어디 없을까.

영업이 잘 안 되는 게 눈에 보여서 애초에 정했던 임금을 반으로 뚝 잘라 사용자에게 도로 내밀며 “향후 이익이 남으면 돌려주든지 말든지 하라”며 호탕하게 웃는 노동자. 어디 없을까. “영업이 잘 되든 말든 당신이 열심히 노력했으면 최저임금이 아니라 생활임금 이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기에 미안해하지 말고 무조건 받으라”며 은행계좌에 약정임금을 흔쾌히 송금하는 사용자. 어디 없을까.

▲ 박흥준

경영난 타개를 위해 노동자와 사용자가 서로 양보 경쟁을 하고, 더 주려하고 덜 받으려 고집을 부려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임금은 최소한의 것이니 다 받아서 알아서 써야 경제가 제대로 굴러간다며 노동자를 점잖게 타이르고, 이 말을 듣지 않는 노동자의 ‘비경제적 고집’을 개탄하는 사설과 칼럼이 연일 실리는 보수언론. 어디 없을까. 이러한 보수언론과 노동자를 동시에 나무라며 보편복지의 꽃, ‘기본소득’이 있으니 임금은 절반쯤 반납해도 인간적인 삶 유지가 가능하기에 발상을 전환해 경제부터 살리자고 외치는 진보언론. 어디 없을까.

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이고 노동자가 생활임금 이상을 제대로 받아야만 일정한 구매력이 유지돼 상품을 합리적으로 일정하게 소비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만 공장이 돌아가며, 공장이 돌아야 경제가 올곧게 성장한다며 입에 거품을 무는 보수논객. 어디 없을까. 소득주도성장이 그래서 필요하며 대기업 갑질(착취)부터 근절해야 우리가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가지게 된다고 핏대를 세우는 보수논객. 어디 없을까.

“최저임금 10.9% 인상은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가 어려운 건 가맹점 본사의 온갖 횡포와 천정부지의 점포 임대료, 다른 곳보다 훨씬 높은 카드수수료 때문이지. 우리끼리 싸움 붙이지 말았으면 해. 마음 같으면 가맹점 본사의 횡포를 규탄하는 집회를 만들었으면 해. 최저임금 반대집회 말고. 최저임금은 본질이 아냐. 영향은 조금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가맹점 일제히 탈퇴해서 우리끼리 건실한 유통업체 하나 새로 만들고 최저임금 이상을 알바직원에게 지급하겠다고 본사와 과감히 맞서고 싶어. 자율협약이 아니라. 심야할증이 아니라.”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해 작년 인상분을 무력화한 건 내가 봐도 낯간지러운 일이야. 중소기업 하기 아무리 힘들어도 이건 아니지. 문제는 납품단가야. 우리가 기술개발로 생산비 절감하면 뭐 해. 대기업이 납품단가를 그만큼 깎아버리는데. 최저임금이 문제가 아냐. 사실 우리도 좀 비겁한 건 맞아. 이런 얘기를 대기업 가서 해야 하는데. 인력난도 그래. 웬만큼은 돈을 줘야 누가 오지. 이번에 보니까 저 하늘같은 경제단체들이 우리 걱정을 하더라고. 최저임금이 너무 높아져서 중소기업이 더 힘들어질 거라나. 고양이 쥐 생각 하는 거지. 납품단가나 후려치지 말라고 해. 나 원 참. 같잖아서.”

최근 벌어진 ‘최저임금 인상논란’에서 빠진 것 가운데 하나가 ‘생활임금에 대한 고찰’이 아닐까 한다. 500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계를 면밀히 살피고 그들의 노동에 제 값을 쳐주려는 노력 대신 본말전도(本末顚倒)와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와 거두절미(去頭截尾)가 횡행했다. 최저임금 불복종(이건 형사처벌감이다)이 공개적으로 거론되고 소상공인들의 집회(기자회견)에 배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한편에서 일기도 했다. 그 결과는 최저임금의 의미가 현저히 왜곡되고 노동자의 삶이 또 한 번 우롱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경제는 아직 멀었다.

‘최저임금’,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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