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땀과 눈물과 사랑을 선물하는 세상이 아니다.

“아버지. 이거 어때요?” 보름이가 숨을 몰아쉬며 올라와 조그만 종이상자를 내려놓는다. “예쁘네. 그게 뭐야?” “바로 이거예요.” 뚜껑을 열자 거기에 세 개의 병이 있고, 병마다 잡곡이 담겼는데 수수와 조, 팥이었다. 며칠 전부터 며느리는 저온창고에 보관중인 잡곡을 처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추석에 팔 선물세트를 만들어 보았는데 어때요?” “좋다. 좋아.” 포장이 야무지고 예뻐서 눈에 확 들어왔다. 누가 받아도 기분좋아할 것 같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였고 이내 걱정에 사로잡혔다.

“이래가지고 이거 얼마나 받으려고?” “얼마 받을까요?” “포장비가 꽤 들었을 거 같은데. 상자 값이 얼마야? 병은?” “상자 값이 이천오백 원, 병은 하나에 육백 원인가? 그 정도 돼요.” “그럼 알곡 원가 따지고, 포장비 따지고, 수공비 따지면 얼마 받아야하는 거야? 만오천 원? 이만 원? 배송비는?” “이만 오천 원은 받아야지요.” “이걸 이만오천 원? 알곡 값이 얼만데? 곡물은 값이 정해져 있어서......” “아유, 아부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요.”

▲ 김석봉 농부

내가 하는 걱정엔 아랑곳없이 아들놈이 핀잔하듯 가격을 정한다. 며느리와 아내도 맞장구를 쳤다.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 법도 하련만 나는 자꾸만 걱정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결코 잘 팔릴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에 포장상자를 애지중지 여기는 가족들 보기가 미안했다.

지난해 이맘때, 이웃들과 모이는 평상 건너편 언덕배기 노샌댁 밭은 하루 종일 요란했다. 수수와 조와 기장을 심은 밭이었다. 이삭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노샌댁은 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희뿌옇게 동이 터올 때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한시도 밭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새를 쫓는 일이었다. 구름장 같은 새떼가 수수밭에 내렸고, 노샌댁은 찌그러진 양은 다라를 요란하게 두들기며 새떼가 내려앉은 밭 귀퉁이를 향해 달려갔다. 새떼가 무리지어 떠올랐고, 잠시 떠오른 새떼는 한 바퀴 휘돌다 그 커다랗고 기다란 밭의 빈 구석에 다시 내렸다. 노샌댁은 다시 양은 다라를 두드리며 새떼가 내려앉은 곳으로 달려갔고, 새떼는 다시 솟아올랐고...... 그게 노샌댁의 하루 일과였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 마침내 추수철이 다가왔다. 노샌댁 마당은 연일 도리깨질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많은 조와 기장을 도리깨질로 털었다. 초벌털이에 두벌털이까지 열흘 넘게 도리깨질은 계속되었다. 다음은 키질이었다. 껍질과 검불을 털어내기 위한 키질은 사흘을 넘겼다. 그렇게 해서 자루에 담긴 알곡만 열댓 가마쯤 되어보였다.

“아지매. 서숙과 수수를 내가 좀 사려고요. 팔 거지요?” 탈곡이 끝나고 창고에 자루를 쌓아둔 뒤에서야 나는 노샌댁을 찾았다. “그럼 팔아야지. 얼마나 살라고?” 노샌댁은 마당 컨테이너 창고 열쇠를 챙겨 나오며 환하게 웃었다. 새를 쫓을 때나 도리깨질을 할 때, 키질을 할 때는 어디에 저런 표정을 감추어 두었을까. 비낀 햇살 받은 한 조각 새털구름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얼마나 해요? 키로(kg)에.” “몰라. 아직 금이 안 나왔어. 농협에서 수매를 해야 금이 나오지.” “아, 그럼 내가 농협에서 주는 돈보다 열에 하나 더 계산해서 드릴게요. 그럼 되겠지요?” “아, 그럴 거 까지는 없고, 그냥 농협에 내는 금으로만 쳐주면 되지......”

나는 조와 기장과 수수를 각각 세 가마씩 샀다. 조그맣게 포장해서 민박손님들께 팔기도 하고. 아직도 이런 잡곡을 생산하는 농부가 있다는 것이 고마웠고, 이런 잡곡을 볼 수 있는 우리 마을을 자랑도 하고 싶어서였다.

잡곡을 사긴 샀으나 도정이 문제였다. 수소문을 해도 근처 방앗간은 잡곡도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낱알이 작은 조와 기장이었다. 그나마 찾아낸 가장 가까운 방앗간은 산청 생초방앗간이었다. 그 방앗간도 수수까지는 빻을 수 있지만 조와 기장은 어렵다고 했다. 수수 빻는 기계에 조와 기장을 넣으면 겨가 잘 빠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시 키질을 하고, 선풍기 틀어놓고 먼지털이 작업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산청 생초방앗간에서 도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와 기장은 겨와 알곡이 그대로 섞여 나왔다. “아지매. 내가 또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노샌댁을 찾았다. “오늘 산청까지 가서 서숙하고 기장을 빻아왔는데 이게 다 섞여서 나와서 다시 손을 봐야 한대요. 우리는 할 수도 없고...... 품삯은 드릴 테니 아지매가 어찌 좀 해주시면....”“아이고, 해드려야지. 싣고 오소. 내 바쁜 일 좀 끝내놓고 해줄게.”

노샌댁은 꼬박 이틀을 키질에 매달렸다. 노샌댁 마당과 마루는 온통 샛노랗게 조와 기장의 겨가 두껍게 쌓였다. 노샌댁도 말이 아니었다. 눈과 입만 그 윤곽이 보일 뿐 얼굴이 온통 겨에 덮혔다. 품삯도 품삯이지만 이런 일을 시킨 것이 미안해 일이 끝날 때까지 노샌댁 집 앞을 얼씬거릴 수조차 없었다.

키질만으로 일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워낙 낱알이 작다보니 미세한 모래알갱이가 섞이는 것이었다. 아내는 키질을 마친 조와 기장을 큰 다라에 넣고 물로 씻어서 미세한 모래를 걸러내고 다시 말리는 작업을 했고, 마른 알곡을 자루에 담는 것으로 잡곡생산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좁쌀 한 톨이 안고 있는 땀과 눈물과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저 선물세트는 잘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랑과 눈물과 땀을 아무리 정성껏 담아냈어도 저 선물세트는 잘 팔리지 않을 것이다. 저 알곡이 비록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가치를 가득 안고 있다 해도 저 선물세트는 잘 팔리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은 잡곡을 선물하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땀과 눈물과 사랑을 선물하는 세상이 아니다. 정성을 선물하는 세상이 아니다. 가치를 선물하는 세상이 아니다. 주는 이가 즐거워하고 받는 이가 기뻐하는 선물의 세월은 갔다.

며느리가 만든 저 선물세트를 앞에 둔 아침, 나마저도 저 선물세트를 선물하고 싶은 곳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아침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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