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염과 성장의 목격담

천고마비의 계절, 아들의 책상 위엔 코 푼 휴지가 수북하게 쌓여간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조금 선선해졌다고 느끼는 찰나, 어김없이 치고 들어온 비염. 기상청의 슈퍼 컴퓨터보다 정확도가 높은 계절 알람이다. 가을만 되면 너는 코가 막히고, 지켜보는 나는 답답함에 속이 막히지. 웅얼웅얼 코맹맹이 소리로 너 지금 뭐라는 거니? 아휴. 본인은 오죽할까.

비염과 함께 돌아온 중간고사. 시험이 코앞인데 방문 닫고 들어간 지 30분 동안 내 귀엔 코푸는 소리만 들려온다. 저게 뚫려야 집중이 될텐데. 부스럭대며 비염 약을 찾아 먹이고 생각날 때마다 먹는 홍삼도 뜨끈하게 데운다. 다시 30분이 흐르고, “엄마, 나 족욕해주면 안돼요?” 그래, 족욕으로 땀을 빼주면 숨쉬기 편해질 거야.

▲ 재인 초보엄마

우리 집 족욕기는 전코스 수동식이다. 화장실 변기뚜껑을 내리고 앉아서 대야에 발을 담그는 시스템. 그 옆에서 물이 식으면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10여 분이 지나자 아들의 콧잔등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마치 붉은 물감 통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발목까지 불그스레해졌다. 내친 김에 아들의 발을 씻겨준다. 밥 먹은 게 발로만 갔니? 돌쟁이 때, 손바닥 위에 아들을 올려놓고 균형잡기도 했었는데. 어느 새 장군 발이 됐구나. 이 발로 넓은 세상 누비거라. 탄탄하고 깨끗한 곳만 디디면서. 세숫대야 지름과 맞먹는 녀석의 발을 구석구석 만져주고 마지막은 시원하게 찬물로 헹굼. 아들이 말갛게 웃고 있다. “헤헤~ 엄마가 발 씻겨주니까 기분좋다.” 오케이, 이 좋은 기분으로 공부를 하는 거야!

헌데 아들은 침대로 직행이다. 노곤해진 모양이다. “엄마, 너무 졸려요. 불 좀 꺼주세요.” 그래, 조금이라도 코가 뚫렸을 때 푹 자야지. 문을 닫아주고 돌아서는데 남편이 웃고 있다. 내 뚱한 표정을 본 것 같다. “공부는 내일부터 하면 되지 뭐. 당신도 좀 쉬어.” 자리에 누웠지만 눈이 말똥하다. 도대체 공부하기 좋은 컨디션은 언제 온단 말인가.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생각은 이거였다. 내일부턴 진짜 중간고사 대비 시작이다.

다음 날, 퇴근하자마자 아들이 싱글벙글 오더니 작은 책을 한권 내밀었다. 손바닥 크기의 포켓북. 영어 단어 암기하려고? 열었더니 속이 비었다. 칼로 속을 네모나게 도려낸, 껍질만 책이었다. 이게 뭐야? “속았지? 진짜 같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응. 오늘 하루 종일 이거 하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어요.” 그랬구나. 나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첩보영화 보면 나오잖아. 책인 줄 알고 열어보면 총 들어있고. 그치?”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래, 아들인 줄 알고 키웠더니 웬수가 있고 그런 거랑 비슷하네.' 엄마 속을 알 길 없는 아들은 마냥 신이 났다. “우리 반 애들도 다 좋아했어. 500원 주고 팔까 하다가 만든 게 아까워서 그냥 갖고 있으려고. 되게 폼 나지?” 나는 언제쯤 이 대화를 끝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책도 만들었고 그럼 이제 공부를 해봐야지?

멀쩡한 책을 칼로 도려내서 엉뚱한 짓 할 시간에 나 같으면 영어 단어를 외겠다고 군시렁 대고 있을 때쯤, 아들의 방문이 열렸다. “엄마, 나 몸이 너무 가려워요” 날씨가 건조해지면서 가려움증이 도진 걸까. 몸에 보습제를 발라주고 적당한 연고가 없나 뒤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들의 외침. “엄마, 엄마” "왜 또!!" “나 겨털 났어!” "뭐?" “여기 겨털 났다고! 와, 진짜 났어. 보이지? 보이지?” 아들의 겨드랑이에 몽글몽글 솜털이 솟아나 있었다. “와하하.. 겨털 났다. 기념으로 사진 찍을까? 엄마, 좀 찍어주세요!” 육안으로도 겨우 보이는 솜털이 카메라 렌즈에 잡힐 리가 있나. 남편까지 합세해서 몇 차례 용을 써보다가 그냥 우리끼리 셀카를 찍는 것으로 마무리. 그날도 공부하지 않을 핑계거리를 찾아낸 아들은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초벌부추 같은 솜털의 목격자 두 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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