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의 ‘재판거래’ 진상규명, 국회가 나서라

마치 양파껍질이라도 벗기는 것처럼 까도, 까도 비리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 관련 얘기다. 실체적 진실이 드러날수록 그동안 시민들이 사법부와 그 구성원인 판사들에 대해 얼마나 어리석고도 순진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제 ‘인권과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의 개념정의는 달라져야 한다. 또 ‘헌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한다’고 믿었던 판사들에 대한 고정관념도 신기루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사법부의 이완용’, 양승태의 경우에는 ‘독립적이어야 할’ 판사들을 군대식의 상명하복에 의한 철저한 지휘체계 안에서 옭아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선의의 관리자여야 할 사법부의 수장이 ‘사법부의 독재자’로 변신해 자기만의 왕국을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판사의 독립성’을 운위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뿐이다.

최근에 드러난 사실만 해도 ‘비자금 조성’에 이어 드디어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을 지낸 변호사가 의도적으로 증거인멸을 시도했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도대체 ‘양승태와 그 일당’의 사법농단의 끝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쯤 되면 사법부가 아니라 무슨 마피아나 조직폭력 집단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법을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켜내야 할 사법부’가 다름 아닌 범죄집단이었다는 말이 된다. 당초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서 출발했다가 재판거래 의혹으로 비화했고, 이제는 국고손실 혐의까지 포착된 것이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2015년 당시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를 비밀리에 인편으로 건네받아, 행정처 예산담당관실 금고에 보관했다고 한다. 검찰에 따르면 “법원 재무담당자들이 한도액 규정을 초과하지 않도록 소액으로 나눠 대법원에 전달했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일선법원의 예산 수억 원을 빼돌려 조성된 비자금으로, 상고법원 추진에 나선 고위 법관들에게 대외활동비와 격려금 등의 명목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비자금 조성을 엄중하게 처벌해야 할 입장에 있는 대법원이 약삭빠르게 비자금을 조성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치졸한 범죄 수법은 또 어디서 익힌 것인지 궁금하다. 당시 대법원 예산 담당자는 검찰에서 “윗선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윗선’이 행정처 차장 수준일 리는 만무하다. 당시 행정처장(박병대)과 대법원장(양승태)은 물론 예산을 지급받은 판사들도 모두 불러 사용처를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는 ‘조직적인 증거인멸 시도’까지 나왔다.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었던 유해용 변호사는 검찰에 ‘문건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으나 이를 어겼고, 대법원은 임의제출을 요구하는 검찰에 ‘회수하면 된다’며 늑장을 부렸으며, 영장전담 판사 박범석은 유해용과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함께 근무했음에도 ‘회피’ 제도를 거부한 채 두 차례나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짜고 친 듯’ 조직적으로 증거인멸을 방조한 셈이니, 사법부 전체가 공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사안은 사법부 전체의 신뢰 상실과 더불어 법원의 이중 잣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유해용이 빼돌린 것과 같은 보고서 등을 검찰이 요구하자 “대외비에 준하기 때문에 외부에 제공해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외부 유출에 대해선 “부적절하지만, 죄는 되지 않는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그런데 ‘25년의 판사 경력을 가진’ 유해용은 구속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로 향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불리할 것이 명백한데도 왜 서약서까지 무시하고 증거를 인멸한 것일까? 결국 그것은 문건에 담긴 내용이 자신이 당할 구속과 처벌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감추어야 할 만큼 중요한 범죄의 단서’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한 꼴임을 반증한다. 어느 변호사의 “재판 과정이 얼마나 심각하면 ‘프로 중의 프로’인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가 불리한 정황에도 증거인멸까지 하겠느냐”는 지적은 이를 웅변한다. 검찰은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과 전 국가정보원장 원세훈 재판, 통합진보당 사건 그리고 전 대통령 박근혜의 측근이었던 박채윤 특허소송 등 유출된 재판기록이 수만 건에 이른다고 했다. 유해용이 현직에 있는 후배 법관들에게 “법원에 근무할 때 습관처럼 작성·저장했던 자료들 중 일부를 추억 삼아 가지고 나온 것”이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돌린 점으로 보아, 법원 내부에 검찰 수사를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문제는 법원이 협조를 안 해줄 경우, 검찰의 사법농단 의혹 규명 수사는 단계마다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장 유해용의 공무상기밀누설 혐의 입증을 위해서는 법원행정처의 협조와 서울중앙지법의 영장 발부가 필수적이다. 수사대상이 법원인데다, 수사과정에서 꼭 필요한 구속영장과 압수수색영장 발부 주체도 법원이기 때문이다. 법원이 증거인멸을 사실상 방조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에 대해 법원은 부인하고 있지만, 그동안의 행태는 이 같은 해명을 무색하게 한다. 2016년 전국 법원의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89.2%였다. 그러나 사법농단 수사가 시작된 이후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10%에 그쳐 법원의 수사방해, 혹은 수사거부 의도를 누구라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법원의 철통방어를 검찰의 수사망이 좀처럼 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책임이 크다. 법원이 검찰 수사에 협조는커녕 수사 방해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데도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처음 임명됐을 때 기대됐던 신임 대법원장으로서의 패기와 개혁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김명수는 잘 생각해야 한다. 사법부의 존망이 걸려있는 지금, 양승태 등 사법농단의 적폐 무리를 깨끗이 척결하지 못할 경우, 자신과 사법부가 겪게 될 위기를 말이다. 사법농단의 핵심세력이 자신의 선배들이라고 해서 머뭇거리면서 개혁조치를 지연시킬 경우, 도리어 자신이 대법원장 자리를 제대로 보전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며 이는 곧 사법부 전체의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많은 똑똑한(?) 판사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법부 전체가 증거인멸의 방조범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됐는데도 조용하기만 하다. 한국사회의 0.01% 최우등생으로 꼽히는 판사들의 이런 모습은 오도된 엘리트의식과 법원 내의 폐쇄적인 문화가 초래한 결과다. 망가질대로 망가진 사법부를 바로 세우기 위한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만의 리그’,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오만과 일탈은 중단돼야 한다.

결국은 시민을 대변하는 국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마침 국회 법사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국정조사를 통해 위법‧불법행위가 드러날 경우, 해당 법관에 대한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국회는 사법농단 관련 특별법 제정을 통한 특별재판부 설립을 위한 입법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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