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창 밖 닭장의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올해 여름엔 귀퉁이방에 민박손님이 들 때면 마음을 졸여야 했다. 유난히 더운 날씨로 들창을 개봉하면서부터였다. 귀퉁이방은 들창이 하나 있는데 들창 밖이 화목보일러실이고 장작더미가 쌓여있어 창을 밀봉해두었었다. 그 들창을 무더위가 걷어낸 것이다. 막아두었던 합판을 뜯어내고 모기장을 발랐는데 방이 한결 시원해졌다.

“아버지. 저 닭들 죽으면 이제 앞으로 닭은 안 키우면 좋겠어요.” 들창을 개봉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보름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왜?” “민박손님들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정말 그렇겠다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제는 닭이었다. 들창 밖 화목보일러 뒤편에 닭장이 있고, 여덟 마리의 닭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매우 평화로운 공간이 있다. 문제는 한 마리의 수탁 때문이었다. 그 수탁은 새벽 네 시면 어김없이 울었다.

▲ 김석봉 농부

별자리도 변하고, 낮과 밤의 길이도 달라지는데 저 닭은 매일매일 그 시각에 울었다. 귀퉁이방 들창과 닭장이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머리맡에서 우는 거와 다름없었다. 귀퉁이방 손님은 더위 때문에 저녁잠 설치고, 닭 때문에 새벽잠을 설쳐야 했다.

‘아버지. 저 닭 좀 쫓아주세요.’ 올해 여름에 나는 보름이로부터 날아든 이런 문자를 시도 때도 없이 받았었다. 뒷마당에 망을 쳐두었건만 이제 닭들은 망을 넘어 온 집안을 싸돌아다녔다. 그러다 자리 잡고 쉬는 곳이 하필이면 아들내외가 사는 집 창문 너머였다. 세 살 박이 손녀가 낮잠을 자는 시각이 닭들도 창문 너머에서 모여 쉬는 시각이었다. 수탁은 그 시각에도 홰를 치며 크게 울어댔다.

매일 오후 두 시쯤이면 이웃집 평상에서 놀다 닭을 쫓아달라는 문자를 받았고, 나는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가 닭을 망 안쪽으로 몰아들여야 했다. 이래저래 닭이 문제였다. 꽃밭 헤집고 다녀 아내에게 핀잔 받고, 마당 여기저기에 똥을 누고 다녀 나에게도 핍박받으니 저게 제 명대로 살까싶었다.

하루는 깊은 낮잠에 빠졌는데 귀가 얼얼하도록 수탁 우는 소리가 요동을 쳤다. 닭이 방 안까지 들어왔나 싶어 화들짝 놀라 일어났는데, 바로 창 밖 돌담 턱받이에서 목을 빼고 우는 것이었다. 누워서도 빤히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닭은 이제 안채와 돌담 사이 비좁은 통로까지 점령해버린 것이었다. 창을 열면 손에 잡힐 듯한 거린데도 수탁은 그 볼썽사나운 눈알만 껌벅거리며 멀뚱멀뚱 쳐다볼 뿐 옮겨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암탉 일곱 마리가 하루에 달걀 서너 개를 낳는데 아쉬운 대로 달걀 자급자족은 되지만 들이는 공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경제성이었다. 닭장 주변에 내 그림자라로 얼른거리면 닭은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르 떼로 달려 나와 꾸룩거렸다. 그때마다 한 바가지씩 먹이 퍼주고, 밭에 나갔다 돌아올 때면 풀 뜯어다주고, 시도 때도 없이 물 갈아주는 일만 해도 힘에 겨웠다.

물그릇이 얼어붙는 겨울이면 닭을 기르는 일은 고역이었다. 꽁꽁 언 물그릇에 뜨거운 물 부어 녹이고 미적지근한 물 넣어주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얼어버렸다. 하루에 두어 번 물그릇 녹이고 미적지근한 물 채워 줘야하는 겨울엔 달걀도 별로 낳지 않아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싶었다.

그렇다고 정말 닭이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나쁘거나 귀찮은 존재만은 아니었다. 장마가 끝나고 닭장 앞 켜켜이 쌓인 닭똥과 톱밥을 긁어 부대자루에 담았는데 자그마치 열여덟 자루가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김장채소 퇴비로 넉넉할 터였다.

어디 그뿐인가. 대밭이 있고, 돌담이 있는 시골집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지네로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마당가 버려진 종이상자 하나만 들춰도 거기 지네가 기어 다녔다. 자다 말고 천정을 기어가는 지네에 놀라 자지러지기도 했고, 밥을 먹다 밥상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지네에 놀라 밥그릇을 엎었던 적도 있었다. 어느 핸가 아들놈은 자다 지네에게 입술을 물려 퉁퉁 부은 적도 있었으니 지네와 함께 산다는 말이 과한 것도 아니었다.

닭과 지네는 상극이라. 닭을 키우고부터 그 무시무시한 지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집과 대밭 사이, 뒷마당과 집과 돌담 사이 비좁은 통로를 닭이 점령하면서부터 지네는 씨가 말라버렸다. 닭은 하루 종일 그 공간을 오가며 땅을 헤집고 꼬물거리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올해 우리 집에 나타난 지네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새벽 네 시, 닭이 울면 나도 눈을 뜬다. 잠시 마당에 나가 앵두나무 아래 오줌을 누고, 새벽바람을 쇠고, 하늘 속 별들을 보고, 솔부엉이 우는 소리와 풀벌레소리를 듣고, 들어와 누우면 닭은 그 큰 소리로 계속 울어댔다. 닭이 울 때마다 귀퉁이방에 든 손님 걱정이었다.

“아이구, 새벽에 닭 때문에 잠을 많이 설쳤지요?” 이후 귀퉁이방 손님께 건네는 아침인사는 이랬다. 잠을 설쳐 불쾌해하지나 않는지 눈치를 봐가면서 조심스레 반응을 살피는 일이 괴로운 아침이었다.

“앗따, 장닭 우는 소리 참 크더만요. 그래도 좋았습니다. 가까이서 새벽닭 우는 소리도 듣고. 언제 이런 소리 들어보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대개 이런 정도의 반응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우리 집에서 닭을 키우기 전에는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요즘은 시골집이라고 다 닭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알도 안 낳는 수탁을 키울 이유도 없어서였다. 우리 마을에 닭을 몇 마리씩 키우는 집이 두어 곳 있는데 다들 수탁은 키우지 않았다. 우리 마을을 새벽닭이 우는 마을로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저 수탁이 있어서였다.

왜 우리는 저 닭의 울음소리를 시끄러울 것이라고만 생각했을까. 동이 훤히 터올 무렵 골목을 지나가는 경운소리의 굉음도 시끄럽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마을을 드나드는 개장수, 고물장수, 생선장수들의 쩌렁쩌렁한 확성기소리에는 무감각해하면서, 텔레비전을 켜두고 잠들기 일쑤면서, 집안을 울리며 웅웅거리는 낡은 냉장고소리도 일상으로 듣고 살면서 어찌 저 닭의 울음소리에는 예민했을까.

길게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리는 저 소리는 얼마나 역동적인가. 도회지의 온갖 소음에 막힌 귀를 시원하게 열어준 소리는 아니었을까. 향수를 몰고 온 아름다운 소리는 아니었을까. 그간 잊고 살았던 그 무엇을 되찾아준 그런 고마운 소리는 아니었을까.

그래, 모든 자연의 소리는 싱그러운 것이다. 무논에서 들려오는 맹꽁이 무당개구리 참개구리들의 합창, 꽃밭을 울리는 벌떼 닝닝거리는 소리, 미루나무 가지를 뒤흔드는 왕매미 털매미 애매미 노랫소리, 귓전을 간지럽히는 풀무치 여치 귀뚜라미소리, 눈 쌓인 숲 속 산벚나무 소나무 오리나무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

쪼륵 쪼륵 쪼르륵 개울물 흐르는 소리, 쉬이 쉬이 쉬이잉 대숲을 빠져나오는 바람소리, 똑 똑 또독 또도독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쩌엉 쩡 쩌어엉 겨울 강 얼음 갈라지는 소리, 우릉 우르르릉 우르릉 소나기 속 울리는 천둥소리, 철썩 철썩 좌르르르 파도에 휩쓸려 몽돌 구르는 소리, 꿈길 따라 다가오는 그대 발자국소리.

그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생선사려, 사과사려, 칼 갈아요, 대목장 왁자한 소리는 아름답다. 대장간 풀무질하는 소리는 아름답다. 아궁이에 콩깍지 태우는 소리는 아름답다. 담 너머 빈집 드나드는 쥐 울음소리는 아름답다. 박샌댁 조 수수 콩 키질하는 소리는 아름답다. 집배원이 지나가는 오토바이소리는 아름답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과 전화하는 소리는 아름답다. 이웃집 노인네 새벽 요강 끌어당기는 소리는 아름답다.

이 세상에 화를 내고 악다구니를 내지르는 사람의 소리, 나무라고 겁박하는 사람의 소리보다 못한 소리가 무엇 있겠는가. 그런 소리 속을 살아온 삶, 내 삶의 흔적 속에 깊이 각인된 그 소리를 이젠 지워버려야겠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나는 또 도축장으로 끌려갈 2년생 닭 열 마리를 들여올 것이다. 수탁이 우는 새벽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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