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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준 칼럼] 차별의 사회학

기사승인 2018.10.07  20: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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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더 차별에 저항하자

한 때 ‘대동세상’이라는 말이 대학가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대충 90년대쯤으로 기억하는데 대학의 축제라는 축제는 모두 ‘대동제’라는 이름을 달고 열렸다. 민족경대 가을 대동제, 멀구슬 대동축제 등등이 그러하였다. 노조의 파업에도 ‘대동’이라는 단어가 등장해 자본가들이 경기(驚氣)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대동’이라는 구호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구호에만 그쳤을 뿐 그로부터 30년쯤 세월이 흘렀는데도 대동세상을 가져오지는 못 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키워드는 그동안의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동’이 아니라 여전히 ‘차별’이다.

차별은 차별을 먹고 번성한다. 아울러 차별은 스스로는 자기를 재생하지 못 한다. 착취를 전제로 해야만 완성될 뿐. 국어사전의 표제어 차별 그 자체는 죄가 없으되 착취를 전제로 한 차별을 내면화 한 인간이 있어서 그들의 언행이 죄를 생산하고 똑같은 인간에게 고통을 안긴다. 차별하는 사람이 있어서 차별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21세기에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는 ‘차별’은 시대마다 그 형태를 달리 하지만 착취라는 본질은 같아서 이 땅에 계급이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죽지 않고 번성할 전망이다. 세상이 그렇다.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고 그렇게 외형적으로 번창한다. 차별이란 무엇인가.

▲ 박흥준 상임고문

가진 자는 가지지 못 한 자를 차별함으로써 그들의 세상을 유지한다. 온갖 방법이 동원되는데 시대를 관통해 주목받는 두 가지 방법이 바로 교육과 이데올로기이다. 교육은 가지지 못 한 자로 하여금 지금의 사회질서를 체념하게 만들어 그냥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고, 그 한계를 인식한 가진 자들이 당근을 적절하게 내밀어 가지지 못 한 자들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체계화한 게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차별은 지배방식 그 자체이다. 그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남자는 여자를 차별함으로써 남자의 세상을 유지해 왔다. 김성태의 그 저열한 ‘출산주도 성장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여자에 대한 차별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져 있다. 계급차별 이상으로 세상을 숨 막히게 하는 게 바로 세상의 절반인 여자를 차별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가사노동에서 여자가 과연 해방되었는가. 몇몇 앞서간다고 자부하는 남자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을 달군다고 해서, 미투(# mee too)를 심정적으로 불편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성하는 척 하는 남자들 몇몇 있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가. 성 차별은 지금도 여전하다. 남자의 세상은 지금도 차별을 수단으로 온존하고 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차별함으로써 그들의 세상을 유지한다. 정규직은 우리 모두의 염원이지만 웬만해서는 도달하기 힘든 피안의 세계가 된 지 오래이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자본가의 노비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정규직들은 그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차별하고 분리통치하는 거야 그들의 논리상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을 차별하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으니 자본가들은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셈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이 세상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서울은 지역을 차별함으로써 그들의 지배적 위치를 고수한다.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든,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든 상관없다. 그리 하여 서울은 썩고 지역은 고사(枯死)해도 그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당장의 돈과 권력만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들 대부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인데도 그들은 그걸 모른다. 그 결과 다양하게 의제된 서울의 문화가 서울에서 밀려난 지역을 지배하고 지역은 이를 추종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이 지역을 차별하는 건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자본가들의 장롱에 쌓인 태산 같은 현금(유보금)은 차별로 이뤄진 성채(城寨)이다. 중소기업을 착취하고 노동자를 쥐어짜서 만들어낸 것인데 이 것은 번영이 아닌 번영의 허상에 불과하다. 그 허상이 밑둥치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차별을 수단으로 순간의 번영을, 아니 번영의 허상을 구가하고 있다. 차별은 이렇듯 힘이 세지만 그 힘이 세상을 시나브로 좀먹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이자 동시에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다. 차별이 있는 곳 치고 저항이 없는 곳이 없었고, 저항이 있어서 역사는 수레바퀴를 굴렸다.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간고한 투쟁이 그나마 오늘을 있게 했다. 차별에 대한 저항이 참정권 확대를 가져왔고, 인권을 신장했고, 부의 재분배를 약간이나마 가능하게 했고, 세상이 망하는 걸 역설적으로 방지했다. 하지만 지금도 차별은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기에 차별 없는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이다.

기왕의 차별에 지금 또 하나의 차별이 더해지려 하고 있다. 김동연 부총리는 몇몇(소상공인이 절대 아니다. 그들의 희생을 담보로 초과이윤을 유지하려는 악덕자본가가 그들이다)의 외마디에 부응하고자 최저임금 차등화(차별)를 공공연히 내뱉고 있다. 직종별 지역별로 고작 최저임금 하나 차등화한다고 10년 이상 침체의 길을 걸어 온 경제가 드디어 살아난다면 그 경제는 이름을 달리 해야 한다. ‘경제’가 아니라 제도가 뒷받침하는 ‘착취의 온존’으로. 왜?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이니까.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어차피 폐기될 운명의 차별을 기왕의 차별에 하나 더 가미해 무엇을 이루려는가. 수레바퀴를 한 걸음 더 늦춘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최저임금 차등화가 정말 필요한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 ‘불쌍한’ 최저임금을, 아니 최저임금에 목을 맨 그 ‘불쌍한’ 노동자들을 지역별로 직종별로 차등화하면 그 뒤에 무엇이 올 지는 명약관화한데 꼭 그렇게 해야 하겠는가.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인가.

한 번 더 차별에 저항하자. 현 단계 저항의 내용은 ‘최저임금 사수’이다. 민주주의, 그리고 그 민주주의의 골간인 경제민주화는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그렇게 이뤄진다. 체념하지 말자. 저항하자. 30년 전 그 이름을 관형어로 쓴 축제에서 시작된 대동세상은 오늘의 ‘최저임금 사수’를 거쳐 언젠가는 그 소박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터이니.

박흥준 상임고문 840039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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