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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의 산촌일기] 산촌의 하루살이

기사승인 2018.10.08  09: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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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속엔 뜨거운 무엇이 있는데, 내 세월은 어찌 이리 태평한지

아침 여섯시를 넘겨 창이 훤해질 무렵 단도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꽃분이가 따라나선다. 멀리 지리산 등성이로 굵은 구름덩이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밭을 둘러본다. 배추와 무는 잘 자라고 있다. 파를 심은 곳은 가뭄을 타는 듯하다. 밤 기온이 낮아 시금치 자라는 속도가 더디다. 찬이슬에 호박덩이는 더욱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발걸음을 옮겨 산으로 향했다. 산밤을 주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부터 묵고 있는 민박손님들이 오늘 떠난다. 다섯 식구 한 가족과 세 식구 한 가족과 부부손님이다. 다섯 식구 가족은 벌써 몇 번째 우리집을 찾는다. 올 때마다 아내가 좋아하는 빵과 마당의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을 위해 간식을 한가득 챙겨 온다. 마땅히 싸 줄 것이 없어 산밤이라도 주워 싸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소나무숲 들머리 산밤나무 아래엔 밤이 많이도 떨어져 있었다. 밤을 주워놓고 싸리버섯이 난다는 주변 소나무숲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버섯은 없었다.

▲ 김석봉 농부

아침시간이 꽤 흘렀다. 집으로 들어서자 벌써 식사가 한창이다. 일찍 숟가락을 놓은 아이들은 마당에서 고양이들과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건네는 비닐봉지를 건네받으며 ‘어찌 이런 생각을 했느냐’는 표정이었다. 손님들도 이슬에 젖은 바짓가랑이를 보며 고마워했다. 된장국과 두부조림으로 늦은 아침밥을 먹었다.

밭일을 하려고 밖으로 나오는데 아내가 이런저런 것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일전에 짠 들기름과 잡곡과 모과효소와 내가 따온 산밤이었다. “손님 보내고 밭으로 갈게. 무도 솎아 고모께 보내야 하고.” “내가 해오면 되지. 그냥 집에서 쉬어.”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자 손님들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골목으로 나서자 꽃분이가 먼저 나와 밭으로 길을 잡았다.

아내가 풋고추를 훑어 볼품없이 헝클어진 고춧대를 뽑았다. 탄저병이 속속들이 들었다. 그래도 올해는 폭염과 여름가뭄으로 많은 고추를 땄고, 농사 후 처음으로 고추를 팔기도 했다. 열두시가 다 되어서야 언덕바지 무밭으로 건너갔는데 거기 아내가 먼저 나와 무를 솎고 있었다. 마산 사는 누이에게 김치 담글 무와 대파를 보내주기로 했었다. “날씨 좋네.” 아내가 토하듯 중얼거렸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은 벌써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올해는 필시 아내와 가을여행을 다녀오리라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두시가 다 되었다. 택배기사에게 전화를 하고 커다란 종이상자에 솎아온 무와 대파를 갈무리했다. 아침에 먹던 된장국과 추석음식으로 만들어두었던 전과 생선을 데워 주린 배를 채웠다. 이제부터는 낮잠을 잘 시간이다. 방안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바둑채널에서 여류국수전을 라이브로 보여주고 있다. 낮잠 자기는 다 글렀다. 전화벨리 울렸다. 이웃집 평상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바람이 서늘해 긴팔 옷을 꺼내 입고 평상으로 향했다.

평상엔 창원이 형과 하샌과 영남아지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단골손님 성샌은 다른 일이 있다고 한다. 창원이 형은 오전 내내 비양골에서 굴밤 너 되를 주웠다 하고, 하샌은 마을 앞산에 송이를 따러 갔다가 허탕만 치고 산밤 한 줌 주워왔다고 하고, 영남아지매는 오전 내내 호두를 깠다고 한다. 어묵탕에 소주 한병을 나눠 마시고 평상 옆 영남아지매네 대추를 털었다. 다들 그렇게 하루를 살았다.

산그늘이 내린 골목을 돌아 집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일찍부터 약속된 외식날이었다. 산 너머 귀촌한 부부의 초대를 받았다. 정토수련원 인연으로 만난 사이였다. 수련원 법사님과 농장일을 도맡아하는 김 거사님과 약속된 식당으로 향했다. 근동에서 내로라하는 중국음식점이었다. 기름진 요리에 연태고량주도 마셨다. 밥으로 마파두부밥을 먹는데 아들놈 어렸을 적 내가 마파두부밥을 해주던 기억이 났다. 참 아련한 옛 기억이 하필이면 그때 떠오르는 것이었다.

법화산 너머에서 달이 뜨려는지 산등성이가 훤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뒷마당에서 외톨이로 떨어져 나와 바깥마당을 차지하고 사는 암탉 한마리가 장작더미에 올라 앉아 꾸룩거렸다. 꽃분이와 고미가 반갑게 몸을 부볐다. 보일러를 켰다. 아직은 화목보일러를 쓰지 않고 간간이 기름보일러를 튼다. 부엌창 너머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우릉거린다. 내일은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밤이 많이 길어졌다. 이렇게 드러누워 엎치락뒤치락 거리다 시계를 보면 열시, 큰일이다. 지금 잠들면 필경 새벽 세시면 깰 것이고, 이후 그 적막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추억을 더듬고, 살아갈 날들을 걱정하고, 뒷산으로 버섯이나 오미자를 따러 갈 궁리를 하면서 닭이 울기를 기다리겠지. 동이 트면 밭을 둘러보고, 산을 다녀오고, 늦은 점심을 먹고, 평상에 나가 가보패를 떼고, 산그늘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겠지. 겨우내 그런 날의 연속이겠지.

하루살이가 대개 이렇다. 아직은 한창 일할 젊은 나이라는데, 간혹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속엔 뜨거운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은데. 내 세월은 어찌 이리도 태평하게 흘러가는지.

김석봉 농부 ksb@kfem.or.kr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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