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과 [장자]를 빗대서

오디세우스의 귀향기는 위험을 뚫고 ‘고향과 확고한 소유로 귀환’하는 영웅의 이야기다. 괴물이야기가 아니라 영웅이야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폴리페모스라는 키클롭스가 등장한다. 오디세우스는 시칠리아 해변에서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이 폴리페모스는 양을 기르면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는데, 오디세우스와 12명의 부하들을 동굴에 가두어 놓고 거대한 돌로 입구를 막았다. 그는 매일 끼니로 두 명의 부하들을 잡아먹었는데 한번은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물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이 "아무도 아니"(우데이스)라고 말한다. 후에 오디세우스는 꾀를 내어 폴리페모스를 포도주에 취하게 하고 잠든 사이에 불타는 장작개비로 외눈을 찔러 맹인으로 만들었다.

장님이 된 폴리페모스가 소리를 지르자 동료 키클롭스들이 도와주러 달려왔다. 동료 키클롭스들은 폴리페모스에게 '누가 너를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폴리페모스는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듣고 다른 키클롭스들은 돌아가 버렸다. 그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부하 6명과 양의 배에 매달려 탈출할 수 있었다.

▲ 이윤호 진주문고 스토리텔러

키클롭스로부터 빠져나온 오디세우스는 ‘세이렌’과 조우한다. 세이렌은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혼의 목소리를 내는 바다의 요정이다. 이들은 모두 노래와 연주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이들은 지중해의 한 섬에 살면서 감미로운 노래로 지나가는 배의 선원들을 섬으로 유혹하여 잡아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의 조언을 받아들여 밀랍으로 선원들의 귀를 막고 자신은 몸을 배에 묶은 상태였기에 그 섬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이 두 개의 서사는 전혀 다른 의미를 읽게 한다. 이 오디세우스의 영웅신화는 자신의 운명과 자연에 맞써 싸우는 인간 혹은 인간문명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과 ‘괴물’의 관계이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대상과 끊임없이 싸우며 자신을 진보시켰다. 그러기에 그 대상은 언제나 타자로 존재했고, 괴물이거나 ‘괴물’(?)이어야 했다. 인간은 처음부터 영웅이어야 했고, 영웅으로 더 진보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괴물은 언제나 영웅을 만들기 위한 타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도 아닌’ 우데우스가 되어야 했고, 돗대에 몸이 묶인채(자유가 빼앗긴) 절규해야 하는 소통불가능한 존재여야 했다. 혹은 밀랍으로 귀를 막힌채 오직 맹목적 노동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여야 했다. 스스로 얻기 위해 자기 소외를 감내하는 문명. 영웅이란 타자를 통해 존재하며 그 조차도 소외로부터 영웅의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영웅 오디세우스다. 자본에게 시민은 키클롭스이고 세이렌이다. 자본의 질서에 순응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아무도 아닌’ 것으로 둔갑해야 한다. 아울러 그저 기둥에 몸을 묶은 채 아름다운 노래의 시민들을 마녀로 둔갑시킨다. 원래 세이렌은 죽은자, 특히 영웅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우는 존재이며 그들의 영혼을 운반하는 요정이다. 오디세이아와 만난 세이렌들은 그가 겪은 과거의 일들에 대해서 이미 이해하고 있고,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노래와 사랑으로 그를 감싸줄 것에 대해 약속한다. 카프카의 [세이렌의 침묵]에서도 잘 보여지고 있다. 세이렌들은 관계의 중심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로 향해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돕고자 하며, 사랑하면서 유혹하고 싶은 배려와 함께 그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타인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이해심과 감정적 끌림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저 합리성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 즉 수단으로만 대한다. 자본에게 시민이란 그저 시장의 구성원이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산가능한’ 도구일 뿐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위험을 맞서 싸워 쟁취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민은 영혼의 전달자인 세이렌에서 마녀 세이렌이 된다.

이제 두 번째 괴물이야기.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한 추인이 있는데 이름이 애태타(哀態咤)라 합니다. 사내들이 그와 함께하면 사모하여 떠날 줄 모르고 여인들이 그를 보면 부모에게 떼를 쓰길 ‘남의 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하고 수십명의 여인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그가 무엇을 창도 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고 다만 항상 화락(和樂)하게 한다는 것뿐입니다. 군주나 대인의 자리도 남을 죽음에서 구한 일도 없고 녹이 많아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가망도 없으며 도리어 추하여 천하를 놀라게 할 뿐입니다. 화락할 뿐 어떤 주장도 없고 지혜도 드러나지 않는데도 남여 구분없이 그 앞에 모여듭니다. 이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인이 그를 불러보았더니 과연 천하가 놀랄 만큼 추했으나 그와 함께 거처한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과인은 그의 사람됨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년도 못되어 과인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마침 재상자리가 비어 있어 그에게 국정을 맡기려 했습니다. 그는 번민하다가 후에 승낙은 했으나 마음으로는 사양하는 것 같았습니다. 과인은 부끄러웠으나 결국 나라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과인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과인은 슬픔에 잠겨 죽을 것 같았습니다. 마치 나라에 더불어 즐거워할 사람이 없는듯 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장자 -덕충부)

[장자]는 첫 이야기부터 괴물이야기로 시작한다. 영웅이 아니라 괴물. 이 괴물은 거대한 괴물인데, 그 괴물은 자신의 갱생과 진보를 내재적 변신을 통해 드러낸다. 무엇을 괴물로 규정하지도 않고, 무엇에 맞서 싸워 대상을 제거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거대한 바람에 순응함으로 그 스스로 비상을 만들어낸다. 재밌는 것은 이 [장자]는 뒤이어 지속적으로 괴물적 ‘비정상성’을 주체로 등극시킨다. “지리소라는 자는 턱이 배꼽에 가려져 있고, 어깨는 머리 위로 솟아 있으며, 땋은 머리는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은 꼭대기에 있으며, 두 넓적다리는 갈비뼈를 누르고 있다.”(4편 -인간세) “절름발이에 곱사등이며 입술이 없는 남자가 위나라의 영공에게 유세하였다”(5편 - 덕충부)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못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애태타라 합니다... 그 사람을 불러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추하기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습니다.”(5편-덕충부)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괴물스러움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대상으로 타자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주체의, 주어의 위치에 서 있다. 더 나아가 그 주체의 태도는 ‘비정상성’이다. 연약하고, 추하고, 아래에 있다. 그 추함과 아래있음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절름발이에 곱사등이며 입술이 없는 남자’는 상대로 하여금 ‘그가 너무 마음에 들어 정상인들을 볼 때면 그들의 목이 너무 야위고 말랐다고 생각‘하게 했으며 너무 추한 남자 애태타는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 남자들은 그 사람 생각에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 사람을 본 여자들은 부모에게, 딴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오히려 그 사람의 첩이 되게 해달라고 조르‘게 된다.

이르자면 너무도 추하기에 모든 대상은 아름다워진다. 가진 것이 없기에 온전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그 혹은 그녀와 함께 한다. 아는 것이 없기에 모든 대상은 연대와 존중의 관계맺음이 가능할 것이고, 그 자체가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적 관계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 ‘괴물되기’에는 비움을 의미한다. 이 비움은 쓸모 없음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소통과 연대의 풍성한 질서이다. 이는 철학적,정치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스로가 ‘괴물되기’란 자신의 내적 성찰을 통해 보다 근원적인 결핍을 깨달아 가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기와 다르게 생겨먹은 대상이 존재함으로 자기다움이 존재할 수 있다는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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