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쉽게 쓰인 칼럼

팩트체크(Fact Check)라는 말이 요즘 유행해서 뜨끔했던 나는 지난 1년 사이 단디뉴스에 쓴 칼럼 40여 꼭지의 팩트를 최근 뒤늦게 일일이 체크해 보았다. 내뱉은 게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지 의심이 들었다. 주장은 온당했는지도. 도둑놈이 제 발 저린다고 나 역시 발이 저리다 보니 이 과업에는 인터넷이 큰 도움이 됐다. 이 나이에 더 이상은 뛰어야 할 필드가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백세 인생이라는데...

아이템(공보계 계약직 공무원이 복사해서 나눠줬다) 쪼가리도 없고 팩스(기계가 삐이이 음과 함께 수시로 서거나 종이가 씹혀서 찢어지거나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기계가 내뱉은 종이쪼가리를 뒤늦게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황급히 처넣고 시치미 뚝 떼는 선배들도 간혹 있었다)도 없고 삐삐도 없고 키보드도 없어서 헐떡이며 논두렁을 뛰어다니다 사무실로 ‘급히’ 들어와 볼펜으로 ‘급히’ 갈기던 시절. 그 시절의 습관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데 몸은 어느 순간 늙었으니 방법은 그 것 뿐이었다. 과연 인터넷은 천리안이었다. 국어사전이었다. 옥편이었다. 폭로자(가짜뉴스)였다. 나를 반성하게 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이렇게 좋은(쉬운) 세상이 열리다니. 요즘 글깨나 쓰시는 분들은 무릎 꿇고 삼가 옷깃을 여며야 한다. 이렇게 쉽게 글을 완성한다면, 자고로 쉽게 쓰인 시는 감동을 주지 못 하는 법.

▲ 박흥준 상임고문

지금도 마음은 성급하고 논두렁을 넘으며 기껏 그러모은 사실(당시에는 ‘팩트’가 아니라 ‘사실’ 또는 ‘스트레이트’였다)이 퍼즐조각이었다. 퍼즐조각도 몇 개 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하지만 쓴다. 그러다 보니 이 글에도 팩트체크가 안 된 채 인용된 부분이 적지 않게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낯을 붉힌 채. 하지만 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왜?

어떤 독자는 읽은 뒤 무시할 것이고 어떤 독자는 행간을 읽으려 노력할 것이고 어떤 독자는 문장의 첫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덮을 것이니. 아 참. 문체가 마음에 안 들어 덮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건조체와 간결체를 신봉하는 일군의 무리(기자)들. 화려체와 만연체를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무리(단순노무직)들. 그분들도 맞다. 나 역시 한 때는 건조체를 신봉했으나 워낙 맺고 끊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요즘 와서 만연체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이 글 역시 만연체이다.

대부분의 칼럼에 문제가 있었다. 수준에 훨씬 미달하는 엉터리 글들을 부끄러움도 모른 채 1여 년 간 써 갈겼다. 팩트는 퍼즐조각이었고 문장에는 기승전결이 없었다. 심지어 수미일관의 꾸밈도 없었다. 글쓰기의 멋부림은 조금 있었다. 지난 1년. 미문의 부끄러움을, 미문을 가장한 추문의 부끄러움을 나는 느끼지 못 했다. 쓰레기였다. 그냥 만연체였다.

팩트는 객관적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쓰임에 따라 글을 쓰는 목적에 부합하는지 아닌지가 팩트를 선택하는 기준이었다. 나에게는 그러했다. 반성한다. 여기에는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시간이 없었다느니. 판갈이가 목전에 닥쳤는데 스트레이트가 안 들어와서 마음이 급했다느니, 나라도 메꿔야 했다느니. 이런 따위 변명은 부끄러움을 내장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다. 이런 글을 지금도 쓰고 있으니.

하지만 한 바퀴 더 돌려 생각하니 부끄러움을 또 한 번 능히 지울 수 있었다. 칼럼이든 스트레이트든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이 사회정의에 부합하면 약간의 팩트 오류는 용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가 뇌리에 한 번 더 스며든 탓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나만 옳으면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합리적 의심’으로 포장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언론에 몸담은 양반들이나 언론을 분석하는 학자들이나 가장 중요시하는 게 팩트이다. 기자 초창기에 외모가 험상궂은 어느 무서운 선배가 나에게 알밤을 먹이며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팩트가 힘이야. 팩트를 가져와. 임마!” 무엇이 팩트인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과거에는 A가 팩트라고 생각했는데 A에 입각한 스토리텔링(B)이 결국은 팩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 뒤늦게 가끔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가짜뉴스가 요즘 화제이다. 최근 들었던 가짜뉴스는 이런 것이다. “문재인이가 김정은이한테 쌀을 다 퍼 주는 바람에 우리나라에 지금 쌀이 없다 안 카나. 그래서 쌀값이 천정부지로 지금 오르고 있다 아이가.” 기왕에도 여러 가지를 들으면서 빙긋이 웃고 말았는데 이번에 들은 뉴스는 좀 심각하다 싶어서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반론을 제기했다. “행임예. 쌀이 없으문 폭동이 일어납니더. 진주농민항쟁, 대구인민항쟁이 다 그랬심미더. 폭동이 일나야 카는데 안 일어난다 아임미꺼. 그라고 쌀값. 쫌 올라야 됨미더. 너무 오랫동안 안 올라씸미더.” “뭐시라. 이 자슥이. 내 다 들었다. 방송에는 절대 안 나온다. 너거가 옛날에 한 말이 뭐꼬. 땡전뉴스라 캤제? 지금은 ‘땡문뉴스’ 아이가.”

반성한다. 나 역시 뉴스를 선별한 건 아닌지. 듣고 싶은 뉴스만 듣고 보고 싶은 얼굴만 본 건 아닌지. “세상은 무릇 이래야 한다.” 라는 신념으로 나머지 방계 팩트는 그냥 무시해 버린 건 아닌지.

하나의 팩트는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살인사건이 났다고 일단 치자. 데일리뉴스 기자는 제일 먼저 경찰서로 달려 갈 것이다. 왜? 하루에 들러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그는 경찰 상황실에서 매우 건조한 사건보고서 한 장을 서둘러 복사해 주머니에 넣은 뒤(요즘은 이메일로 받는다) 다음 갈 곳으로 바쁜 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 건조한 보고서를 토대로 기사는 이렇게 쓰여질 것이다.

“진주경찰서는 오늘 56살 A모씨를 존속살해 혐의로 현장에서 긴급체포했다. 오늘 낮 12시 경찰은 진주시 00동 B씨의 제보로 00동에 출동해 A씨의 신병을 확보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음주 상태에서 8순 노모를 살해하고 자신이 범인이라며 경찰에 직접 신고했다. 경찰은 A씨에 대해 존속살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위의 기사문을 나는 이렇게 다시 써 봤다.

“아아. 힘든 영혼이 있었구나. 어린 시절 총명해서 오랜 세월 어머니의 등골을 빨았구나. 가난을 극복하고 한 때는 잘 나갔으나 어느 순간 구조조정을 당했구나. 실업급여도 다 떨어지고 영세민 취로사업 순위도 뒤로 밀렸구나. 친정 간 마누라는 견디다 못 해 연락을 끊었구나. 조석을 끓여 어머니를 한 10년쯤 봉양했구나.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당신을 힘들게 했구나. 드디어 생이 다 했다고 생각했구나. 어머니를 모시고 가려 했구나. 술이 깨면서 정신이 돌아왔구나. 그런데 어머니는 성급히 가셨구나. 찔레꽃 사이로 어머니가 손짓 하시는구나. 힘든 영혼이었구나.”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