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대(西將臺)와 서상필(徐尙弼)

젊은 시절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말의 영향으로 ‘서장대’하면 ‘놀기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남강과 망진산, 들말을 훤하게 볼 수 있고 그 분위기 또한 고즈넉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진주성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다 보니 서장대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곳이 아니었다.

‘회룡루(回龍樓)’라는 별칭을 가진 서장대는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1930년 전후 훼손되어 무너졌다. 따라서 현재의 서장대는 사라진 서장대가 다시 세워지길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해결하고자 ‘서상필(1892~1955)’이란 분이 사재를 털어 1934년 건립한 것이다.

▲ 조창래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

그렇다면 서상필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당시 진주의 대농 지주로서 1919년 가을 「일신고등보통학교」설립운동이 일어나자 뜻을 같이하는 지역 인사들과 함께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는 일신고보 설립 예정 부지(현 진주중․고등학교 부지)의 상당부분을 기부하였으며, 1923년 3월 설립 인가를 받고 구성된 일신고보 재단법인 평의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20년대에 문맹퇴치를 위해 전개된 야학 설립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부친 서응순(호는 달서)와 함께 진주 제1야학(평안동 소재)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였으며, 부친에 이어 1925년부터 제1야학 회장을 맡아 2대에 걸쳐서 10년이 넘게 제1야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초장동에 소재한 제1야학 졸업생들과 학부모들에 의해 세워진 송덕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상필은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던 1934년 시민들의 염원을 해결하기 위해 서장대 복원에 나섰다. 그는 직접 건축 자재를 구입하고 목수를 고용해 서장대를 복원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제시절 진주경찰서에 연행 ․ 수감되어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데 서장대는 복원되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지 못하고 축소 복원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만난 서상필의 후손(손자) 중 한분은 이점을 몹시 아쉬워하며 언젠가 서장대를 재복원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데 기여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참으로 올바른 정신을 이어받은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 할 것이다. 그는 나에게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생각하게 했다.

 

▲ 여지도서(경상우병영 지도)

그렇다면 서장대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현 서장대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본래 다락집 누각(북장대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18점의 진주성도 중 촉영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진주성도에는 단층 누각으로 나타나있다. 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전국의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邑誌))에 나타난 진주성도가 대표적이다. 물론 세밀한 조사와 검토를 통해 결론을 내야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발굴 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도 있다. 진주시도 서장대의 본 모습을 조사하고 복원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

조금 번거롭기는 하겠으나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서장대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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