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같이'와 함께 떠나는 두번째 마실 후기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의 시, <엄마걱정> -

어머니 배추잎 같은 발소리와 가을볕도 서러운 방울장수 ㅡ신경림 시 목계장터 싯귀ㅡ가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장터. 문둥병에 걸려 아들 술이와 생이별하고 혹여 장터에 나타날까 찾아 헤매는 술이어매 누더기 옷이 보일 것 같은 장터, 저자에 간 남편이 즌 데를 밟을까봐 마음 졸이는 정읍 여인의 애타는 마음이 서린 장터, 그리고 용이와 월선의 절절한 사랑이 애타는 장터, 시골 오일장이거나 그냥 장터이거나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그 장터들은 말만 들어도 비나리 한 가닥 쏟아질 것 같다.

 

▲ 옥종 장날 풍경(사진 = 성순옥)

지난 달에 이어 진주 근방 오일장 마실을 갔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네모진 상점에서 늘 편하게 장을 보지만 그래도 오일장터는 다른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진주같이 마실팀에 합류했다. 반나절 마실이지만 늘 설렜다. 이번 달 장터는 옥종. 진주노을공원에서 만나 완사지나 정겨운 시골국도를 지나는 내내 단풍든 산그림이 휙휙 지나갔다. 옥종 장은 3일, 8일 .

신식 마트도 있고 시장도 새로 단장해서 전통적인 맛은 없지만 장날마다 제자리 찾아오는 생선장수, 옷장수, 쌀, 과일 장수, 건어물 장수. 제각각 점포 하나씩 꿰차고 앉는 모양이 야무져 보였다. 이날 가을볕은 어둡고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움츠리고 다녔지만 걷는 내내 서로 하고 싶은 말들을 아끼지 않고 도란도란거렸다.

 

▲ 은행나무(사진 = 성순옥)

옥종지서 뒤 공터에 차를 대고 어슬렁간 곳은 상천천 따라 육백년 된 은행나무 찾아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길에 묵었다는 이희만의 집터를 보고 오랜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들이 개천에 드리운 그림자도 보았다. 청룡리 은행나무는 마을길을 따라 더 올라가서 보았는데 잎은 다 떨어지고 오랜 나무답게 까치집인지 너 댓개 새 집도 포용하고 있었다.

나무는 특별하게 생겼다. 다른 은행나무처럼 한 줄기가 아니고 여러 겹으로 서 있었다. 나무 한 가운데 가장 굵은 고사한 줄기가 있고 그 주위에 도장지가 나 있고, 이들 둘레에 또 여러 개의 가지가 둘러싸고 있었다. 도장지란 숨은 눈으로 있다가 나무에 변고가 생겨 잘 자라지 않을 때에 저절로 터서 자라는 가지라고 한다.

청룡리 은행나무는 아들 나무, 손자 나무가 겹겹 자라 마치 한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나무는 신기하게도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울음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 준다고 하여 이 동네에서 수호목으로 섬기고 있다 한다.

은행나무 밑에서 기를 잔뜩 받고 시장길을 갔는데 장터하면 술도가, 옥종장터에도 오래된 술도가가 있었다. 1941년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도가집이라고 한다. 잘 익은 막걸리를 병에 담는 모습도 보고 커다란 술 탱크도 들여다보고 모두 양조장 풍경에 술렁이며 한동안 머물렀다.

옥종양조장이라고 새긴 오랜 현판글씨를 보며 세월의 무게도 가득 담아왔다. 술도가를 나와 다시 장터를 돌아 나오는 동안 여느 시골 장터 장날처럼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연장을 파는 가게에 체와 키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질퍽대는 어물전을 지나고 길가에 구지뽕, 고구마, 홍시, 사과를 파는 할머니 손길이 안쓰러웠지만 팔아주지도 못하고 종종걸음, 우체국 앞에 있는 고려 석불을 보고 북방리 고성산성터로 향했다.

 

▲ 고성산성터(사진 = 성순옥)

1894년 동학혁명군 189명이 전사한 곳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위령탑이 보였다. 제 나라 백성을 왜인의 총칼에 던진 못난 나라, 그 부끄러움의 현장이자 진주지역 동학혁명군의 원혼이 깃든 곳이었다. 이 위령탑은 1995년 옥종지역 인사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위령탑에서 소나무 숲길을 올라가면 고성산성터 돌벽 흔적이 남아있다. 동학혁명군이 모여 회의를 하고 죽음 직전까지 저항했을 마지막 벽이 되어준 돌무더기들. 벽은 허물어지고 성터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지만 후손들에게 이렇게 찾아와 기억해달라는 듯 늦가을 추위에 오그리고 있었다.

고성산성을 돌아 꽤 넓은 옥종면 벌판을 지났다. 봄날에 피었을 벚나무 가로수며 학교 건물 , 축사들, 그리고 시설 채소를 키우는 비닐하우스들. 시장을 변화시키는 삶의 모습들을 보며 우리들 삶도 네모지게 박제화되는 듯 그런 기분이었다.

옥종장터에서 좀 떨어진 길을 지나니 불꼬쟁이라는 식당이 나온다. 거기서 즐겁게 점심을 먹고 두양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고려장군 강민첨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서야 그 위용을 드러냈다. 잎은 절반 지고 나무 아래 겹겹 노란 융단을 만든 은행나무. 천여 년 살이 세월 동안 더 얹어진 사람들 살이, 사람들 소망들이 영험함을 보고자 얼마나 예서 기대었던가. 나무도, 잎도, 세월도, 인간의 역사도 마냥 묻혀 왔으리.

세상은 커다란 장터 같은 곳. 북적거리고, 흥정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끊임없이 드나드는 난전 통로 사이로 내 피붙이들 몸을 데우며 사는 숨구멍 같은 곳. 장터 마실이 역사 탐험 마실이 된 날이다. 어제를 열심히 살았던 아지매, 아재들이 그리운 곳이다. 오늘을 덤으로 사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더운 피를 돌게 하는 곳이다. 들판에서, 물에서, 산에서 나는 생물들 한가득 풀어 재미지게 살아내는 판이다. 반나절 마실놀이가 이렇게 하루하루를 옹골지게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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