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세월을 씹어 먹고도 모른다니...

무엇인가를 지킨다는 것.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무엇이 무엇이어도 말이지요. 사람을 해치는 일과 그녀를 힘들게 하는 일만 제외하고요. 우리 조상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것’은 지킨다는 심정으로 그 힘든 시절을 살아 내거나 목숨을 다하셨지요. 그 ‘지킬 것’의 테두리에는 아마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 신념 또는 신조, 자유, 우애, 의리, 평등, 그리고 평화.

구한말 의병들은 외세에 저항해 이 땅의 평화를 지키려 일어섰습니다. 왕조의 핍박을 받더라도 왜놈들이 몰려 와 장검을 휘두르는 상황만 맞닥뜨리지 않으면, 힘들지만 자식이 무럭무럭 크는 걸 어느 순간마다 볼 수 있었지요. 그 분들은 당연히 보수이지요. 물론 왕조를 지키려 했던 분들도 있었지만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 유교였고 유교의 골간은 인(仁)이었으니 당시의 합리적 보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박흥준 상임고문

박종철과 이한열, 김세진 등등은 폭압적인 군부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목숨을 내던졌지요. 마지막 순간의 고통, 참척(斬拓)을 껴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대, 상상이 됩니까. “38선을 베고 누워 죽을지언정 분단국가 수립은 절대 안 된다.”던 김구 선생도 보수이지요. 그 분이 지키려던 가치는 통일이었고 통일은 보수가 맞습니다. 고려 이후 천년 이상 우리는 한 겨레였으니까요. 또 한 분 계십니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통일방안을 가슴에 품고 임진강을 헤엄쳐 북한에 들어간 청년 김낙중. 그 분도 보수이지요. 북한은 강 건너 넘어 온 청년을 1년 만에 돌려 보냈고 그로부터 수십년, 김낙중 선생은 수시로 간첩이 되어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그 분, 보수가 맞습니다.

진보의 한 요소로 이해되고 있는 평등도 따지고 보면 보수의 가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평등해야만 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등해야만 우애가 지켜지니까요. 쌀독에 나란히 쌀을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등해야만 사랑도 분배도 가능하니까요. 사랑을 가르치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공자든 석가든 예수든. 도대체 그 분들이 언젯적 분들입니까. 당대에는 진보였지만 지금은 그 분들도 영락없는 보수로 분류돼야 합니다. 보수의 외연은 이처럼 넓고, 보수의 내포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이제는 이 땅의 보수를 볼 차례입니다. 아니 자칭 보수를 볼 차례입니다. 자칭이 아니라 참칭(僭稱)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겠지만...

무엇인가를 지킨다는 것. 그것도 목숨 바쳐 지킨다는 것. 이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가 있을까요. 이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를 생명처럼 여기는 일. 생명처럼 여겨서 지키는 일.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만 내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굳게 믿는 그 무엇. 그 무엇을 지키는 게 바로 보수이지요. 비굴하게 살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울러 나와 남이 똑같다는 생각.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이념. 그게 보수이지요. 보수의 가치이지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기도하는 자세로 손을 모으면 이긴 사람이 그 손등을 찰싹 때리는 놀이를 방과 후 친구와 한 적이 있지요.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제가 더 때리라고 모은 손을 내리지 않고 버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때리는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간 걸 느낀 뒤 벌어진 상황이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저를 보던 친구는 “이래도냐?” 하는 듯 더 힘껏 제 손을 때렸지요.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친구 역시 지지 않았습니다. 때리고 참아내는 일이 한 10분쯤 계속됐을까요. 여전히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저는 친구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눈물을 흘렸고 친구 역시 울면서 제 손을 때렸습니다. 때리면서 악을 썼습니다. “손 내려. 내리란 말야.” “......” “ 안 내려? 정말이지?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어디까지 가나 보자! 이 새끼야!!”

그 당시 제가 지키려 했던 건 기껏 해 봐야 상처 난 자존심이었을 겁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자존심이었지요. 지금도 가끔 그 시절 그 생각이 납니다. 가슴이 아리도록 정겨운 추억 한 자락이지요. 그 친구는 요즘 어디서 무얼 하는지. 조금 더 세게 때리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부당하게 느껴졌고 그 부당에 저항하려는 의식이 저를 그 지경으로 몰았을 겁니다. 친구 입장에서는? 장난스레 조금 세게 친 건데 눈을 부릅뜨고 대드는 저에게 아마 화가 났을 것입니다. 나보다 공부 잘 하면 다야? 받아쓰기 백 점 맞았으면 다야?

정계에 다시 들어 온 홍 모,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자유당의 김 모, 춘천 목욕탕에서 벗은 채 들킨 또 다른 김 모, 진주의 박 모, 평거동의 또 다른 박 모... 그 외 다수들. 당신들은 보수가 아냐!!! 꼴통이야!!!! 뭐? 보수를 재건하기 위해 뭉친다고? 그게 뭔지 알고는 하는 말입니까. 당신들?

조금은 헷갈리고 조금은 의심쩍고 조금은 기가 차서 한 말씀 드렸습니다. 초딩도 아는 걸 노딩들이 모르다니. 그만큼 세월을 씹어 먹고도 모른다니. 나 원 참.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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