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내게 멍에 같은 운명이다"

오후에 밭을 둘러보러 나갔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다. 건너편 콩밭엔 거두지 못한 허수아비가 드문드문 서서 빈 밭을 지키고 있었다. 검불 사이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 날아오르고, 따라 나온 꽃분이가 컹컹 짖었다. 참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얼었다 녹았다를 거치면서 겉잎이 말라버린 시금치 속잎은 고라니가 다 뜯어먹었다. 따뜻한 겨울날씨에 웃자란 양파와 마늘이 걱정이다. 아직은 푸릇한 봄동이 설렘을 준다. ‘대한 지나면 얼어 죽을 일 없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대한이 낼모레니 겨울도 고비를 넘어선 것 같다.

고추 심을 밭이나마 늘려보려 했지만 마땅한 밭이 나오지 않았다. 올해 농사도 작년과 같은 천 평이다. 작년에 고추 심은 밭엔 고구마를 심고, 고구마 심었던 밭에 고추를 심을 예정이다. 도라지와 더덕 모종은 밭두렁 아래 옮겨 심고, 산마는 감자밭 언저리에 심어야겠다.

▲ 김석봉 농부

이리저리 밭을 거닌다. 가운데 밭 긴 이랑에 고추가 몇 포기 심겨질지 걸음걸이로 재보기도 하고, 호박넝쿨을 어디로 올릴지 높은 밭두렁을 쳐다보기도 하면서 한가로움을 즐긴다.

“농사는 왜 하세요?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농촌에 사니까 하는 거지요. 이웃 늙은 농부들께 대한 예의기도 하고.” 언젠가 집을 찾아온 손님과 나눈 대화였다. 허리가 구부정하게 휘고 다리까지 절름거리면서도 밭에 나가는 이웃 늙은 농부들 앞에서 농사도 하지 않고 농촌에 산다는 것은 그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농사였다.

“농사를 왜 하세요? 별로 남는 장사도 아니라면서.” “달리 할 일이 없어서 하는 거지요.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니까.” 별다른 기술도 없이 농촌에 살면서 할 일은 농사뿐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 농사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지만 따지고 보면 농사만큼 쉬운 일도 없었다. 꼼꼼히 돌보면 잘 자라기 마련이고, 건성으로 돌보면 건성건성 자란다.

농사라는 것을 무슨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 시작한 게 아니었다. 내 삶의 조건이 농사를 하게끔 만들었고, 그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어서 농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밭 언저리에 쌓여있는 퇴비더미 앞에서 올해 농사에 대한 고민을 한다. 묵은 퇴비로는 턱없이 모자라 퇴비를 더 장만해야하는데 그게 걱정이었다. 그동안 인근 남원에서 무항생제 닭똥거름을 받아왔지만 엊그제 ‘항생제달걀’ 뉴스를 보고난 뒤로 통 믿음이 가질 않았다.

지난해부터 항생제달걀이 나돌았고, 친환경인증을 받은 농장에서도 항생제가 검출되었다는 뉴스였다. 얼마나 유통되었는지, 언제부터 검출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지금 밭에 쌓여있는 저 묵은 닭똥거름마저 항생제에 오염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무항생제 인증서까지 복사해 주겠다며 지금까지 자신만만하게 퇴비를 공급해주던 그 퇴비사업자를 믿고 퇴비를 받기엔 마음이 켕겼다.

“왜 유기농을 고집하세요? 하기 어렵다면서.” “글쎄요.” 나는 이 물음에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몸에도 좋고 땅에도 좋아서 비료 안 쓰고 농약 안 뿌린다는 말은 하기 싫었다. 퍼뜩 떠오르진 않지만 그보다 더 고상한 무엇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아직도 명쾌히 찾지 못했었다. 탄저병으로 썩어가는 고추밭 앞에서 많이 흔들렸고, 청벌레가 득시글거리는 배추밭에서 많이 괴로웠으니까. 농자재상에 진열된 분무기 앞에서 많이도 망설였고, 농약방 앞을 지날 때면 발걸음이 주춤거렸으니까.

애지중지 여기며 보살피던 고추가 병들어 처참하게 쓰러지는데 나 몰라라 하는 매정한 내 모습이 두려웠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으로 약국으로 쪼르르 달려가 약봉지를 받아들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살아날 고추가 아니건만 약 한 방울 뿌려주지 않고 말라비틀어지게 방치하는 나는 얼마나 비정한가.

그처럼 비정함을 견디며 농약과 비료 안 쓰고 농사를 지어왔었다. 퇴비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왔었다. 삼복염천 아래 기를 쓰고 풀을 뽑으면서도 그것만이 자랑이었다. 벌레가 창궐해 배추 잎이 모기장처럼 변해버려도 그것만이 자존심이었다.

우리가 받은 그 무항생제 닭똥거름은 이제 믿을 수 없는 퇴비가 되어버렸다. 어찌 보면 이제 관행농으로 바꿔야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스스로 퇴비를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화장실을 재래식으로 바꾸고, 서너 마리의 소를 키우고, 외양간 언저리에 퇴비장을 짓지 않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적당히 살아. 적당히!” “너무 까탈 부리며 살지 마. 나이가 몇이야?”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으며 넘어가곤 했었다. 그렇다고 관행농을 하는 이웃 늙은 농부들의 농사를 못마땅해 하지도 않았다. 농사의 가치는 모두가 숭고한 것이고, 농법은 세상이 만들어낸 도구일 뿐이었으므로.

“몸도 아프다면서 농사를 좀 줄이세요.” “우리 먹을 것만 하면 되잖아요,” 가족들이 이런 말을 할 때도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을 뿐 농사를 줄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묵정밭을 지날 때면 ‘저 밭을 저렇게 두면 안 되는데.’라며 아쉬워했고, 자투리땅을 만나면 호박구덩이라도 파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이 쉰을 넘기자마자 귀농을 결심했고, 기어이 이 산골로 들어왔었다. 주변에선 아직 한참 일할 나이라고도 했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삿짐을 챙기면서도 미련은 없었고, 이사한 다음날부터 텃밭 검불을 걷어내고 배추씨를 뿌렸었다.

그렇게 나는 농부가 되고 싶었다. 흙을 어루만지며 새싹을 보살피는 일만큼 소중한 일은 없겠구나싶었다. 경제적 궁핍함에 대한 걱정도 있었으나 어렵고 힘들어도 농부만큼 신성한 직함은 없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왜 유기농을 고집하세요?” 이제야 겨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내게 멍에 같은 운명이라고. 나는 환경운동가였고, 그래서 농약과 비료를 써서는 안 될 인생을 살았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고, 예의라고. 내가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존중이며, 내 삶의 역정에 보내는 갈채라고.

산그늘이 빠르게 발등을 덮는다. 올해 농사도 많이 힘들겠구나. 산청 간디유정란 퇴비를 한번 알아볼까. 가져올 트럭도 없는데. 아니야. 그냥 그 퇴비사업자를 믿어야지 뭐. 올해는 닭을 스무 마리로 늘려 배추거름이라도 직접 장만해 봐야지.

황량하게 변한 무밭 이랑에서 냉이를 한 움큼 캤다. 저녁엔 아내가 만드는 냉이튀김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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