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티고개에 얽힌 전설을 찾아서

설 가까워지면 생각난다. 추워지면 더욱 그리워진다. 진주 시내에서 합천, 의령 방향으로 가려면 넘는 말티고개가 바로 그곳이다. 봉황의 동쪽날개에 해당한다. 진주의 진산(鎭山)인 비봉산은 진주를 봉황이 날개를 크게 펼쳐 에워싼 형상을 한다. 서쪽 날개가 두고개와 당산재이고, 동쪽날개가 말티고개와 선학산이다. 이 고개에는 모진 매를 맞다가 죽은 나막신쟁이에 관한 설화가 깃들어 있다.

 

▲ 진주 시내에서 말티고개로 가는 길에 있는 옥봉삼거리.

찾은 날은 설을 며칠 앞둔 1월 27일이었다. 1년 중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도 지났는데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 진주 옥봉삼거리에 있는 은열사

시내에서 말티고개로 넘어가는 옥봉삼거리에서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처럼 안내판 4개가 서 있는 은열사로 걸음을 돌렸다. 안내판 숫자만큼 이곳은 들려주는 이야기가 많다. 진주 백성들이 건립한 진주 최초의 사당이다.

 

▲ 진주 은열사는 거란의 60만 대군을 강감찬 장군과 함께 물리친 강민첩 장군의 탄생지다.

고려 현종 때 침략한 거란의 60만 대군을 강감찬 장군과 함께 물리친 강민첨 장군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장군이 지역 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게 해주자 장군이 돌아가시자 사당을 지어 충절과 은혜를 기렸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시대 공무 보던 벼슬아치가 묵던 공공 여관인 개경이 있던 터라고 한다.

은열사를 나와 본격적으로 말티고개를 넘어가려는데 빈 수레를 끌고 중앙시장쪽으로 향하는 이가 하나둘 보인다. 어떤 이는 자전거 뒤에 빈 수레를 매달아 가고 어떤 이는 허리를 폴더폰처럼 완전히 꺾어 수레에 끌려가듯이 지난다. 고단한 삶의 무게가 저 빈 수레에 담겨 있는 양 힘겨워 보인다.

 

▲ 빈 수레를 이끌며 진주 중앙시장으로 향하는 할아버지

말티고개를 넘어 올라가자 쌩~하고 바람이 뺨을 에는 듯 지난다. 나막신쟁이의 한이 찾은 날이 섣달 스무이튿날, 바로 나막신쟁이의 날이었다.

 

▲ 진주 비봉산과 선학산 중간에 있는 말티고개 입구

진주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진주 옛이야기(안동준 지음, 지식산업사 출판사>에 따르면 “옛날 말티고개 언덕배기에 나막신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나막신쟁이’가 살았다고 한다.

 

▲ 진주 말티고개

여름 한 철 장사인 나막신이 겨울에도 제대로 팔릴 리 없었다. 장날이라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나막신쟁이의 눈에는 집에서 기다릴 딸린 식구들의 얼굴이 아련했을 것이다.

장날 물건 팔러 나간 아버지를 배웅했던 식구들 얼굴에 빈손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걸음은 무척이나 힘겨웠겠지. 나막신쟁이는 돌아가는 길에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부자에게 돈 서 냥을 받고 곤장 30대를 대신 맞았다. 평소 제대로 먹지도 못한 나막신쟁이가 건강한 장정도 견디기 어려운 곤장을 서른 대나 맞고 집으로 돌아가다 말티고개 중간에 쓰러지고 말았다.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가장(家長) 아버지를 찾아 나선 식구들. 어두운 밤 중에 찾지 못한 가장은 날이 밝은 다음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꽁꽁 언 손에는 배고픈 가난한 식구들에게 사 먹일 단돈 서 냥이 꼭 쥐어져 있었다.

나막신쟁이가 죽고 난 뒤 매년 이맘때면 모진 바람과 함께 날씨도 유난히 추웠다. 언제 가부터 진주사람들은 이날을 <나막신쟁이날>이라 부른다.” 라고 한다.

 

▲ 진주 말티고개에서 만난 동백

말티고개에서 봉황교 올라가는 옛길에서 꽃샘추위도 잊은 채 버선발로 봄을 맞을 속셈인지 강렬한 붉은 빛은 머금은 동백을 만났다. 마치 나막신쟁이의 눈물처럼 후드륵 지는 동백.

 

▲ 진주 말티고개에서 바라본 대봉정

동백 앞에서 숨을 고르고 봉황교로 올라가는 길에 걸음을 세웠다. 지나온 말티고개 너머를 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뿌옇게 미세먼지가 껴 탁하다.

 

▲ 진주 말티고개에서 바라본 진주 시가지.

말티고개는 지세가 말머리를 닮아 마현(馬頭)이라고 한다. ‘고개 이름은 말띠 과부가 이 고개에서 죽어 그렇다는 설과 경남에서 가장 큰 진주시장에 소나 말을 팔고 가는 고개에서 유래했다(국토지리원에서 엮은 <한국지명유래집:경상편> 중에서)’고 한다.

 

▲ 진주 봉황교 근처 쉼터.

말티고개는 조선 전기부터 진주와 합천 삼가, 의령을 잇는 큰길이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군이 이곳을 넘어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대로를 만들어지며 봉황의 왼쪽 날개(左翼‧좌익)가 끊어져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비봉산과 선학산을 이은 다리가 현재의 봉황교다.

 

▲ 진주 비봉산과 선학산을 이은 봉황교

봉황교 근처 작은 쉼터 긴 의자에 앉았다. 햇살이 드는 자리라 온몸으로 햇살 샤워하듯 쏟아지는 볕을 안으며 시내를 내려다보며 가져간 캔 커피를 마셨다.

 

▲ 진주 봉황교에서 바라본 월아산

봉황교에서 월아산을 보았다. 해와 달을 토해낸다는 산 이름과 달리 미세먼지가 탁하게 시야를 가린다. 괜스레 안경 렌즈만 닦아 보지만 그대로다.

 

▲ 진주 봉황교에서 본 진주성

간질간질 피어나는 매화가 다가올 봄소식을 전한다. 나막신쟁이 섧디 서운 한이 햇볕에 녹아 봄으로 다시금 피어나길 바라며 고개를 넘었다.

 

▲ 진주 봉황교 쉼터에서 만난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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