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 기생도 나서 눈길.. 기생들 “논개의 얼과 기백 잇겠다”

3.1운동은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전 민족이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일제 강점기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운동이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인도 제국의 비폭력 독립운동, 대만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세계사적 운동이기도 했다.

3.1운동은 서울, 평양, 의주 등 전국 6개 도시에서 1919년 3월1일 시작돼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경상남도의 경우 3월10일 이후 3.1운동이 본격화 됐다. 특히 3.1운동은 대중적 운동이었기에 의미가 깊다. 콘도 쇼우이치의 ‘만세소요사건’에 따르면 당시 이 운동으로 수감된 인원만 8천 5백여명, 그 가운데 농민의 비율은 58.4%였다. 그 뒤로 학생(20.9%), 상공업자(13.8%), 노동자(3.8%) 등의 계층이 수감됐다.

오는 3월1일은 3.1운동 백주년이다. 세계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또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기반이 됐던 3.1 운동의 백주년인 만큼 의미가 크다. 다만 대부분의 역사가 그러하듯 3.1운동도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기록돼 있다. 진주의 3.1운동은 서울을 제외하곤 전국 최대 규모였지만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진주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3월18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진주의 3.1운동을 돌아본다.

 

▲ 2018년 진주 삼일만세 의거 재현행사(사진 =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진주 3.1운동은 1919년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갔다가 서울 3.1운동을 직접 목도하고 감동을 받은 김재화, 조응래, 심두섭, 박대업, 정용길 등에 의해 시작됐다. 이들 가운데 김재화, 박진환, 이강우, 강대창 등은 집현면 하촌리와 명석면 남성리 그리고 옥봉동 부근에서 비밀회합을 개최, 만세를 촉구하는 격문을 준비했다.

하지만 3월10일 새벽 누군가 모를 세력이 진주시내 요소마다 격문을 붙여 경남도민의 궐기를 촉구했고, 이에 일본 경찰의 경계가 강화됐다. 이에 이들이 기획한 만세운동 날은 다소 늦춰졌다.

진주지역의 3.1운동은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춰진 18일 시작됐다. 만세 운동은 진주교회의 종소리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본 고등경찰의 보고서인 ‘고등경찰관계적록’에는 박진환, 이강우, 강대창 등이 3월 18일 진주시내 예수교예배당(현 진주교회)에서 울리는 정오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고 기록돼 있다. 이날 진주에는 인근 6개 시군에서 모여든 2만 여명이 진주교회 종소리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 진주교회 한 측에 위치한 진주 기미독립만세의거 기념주탑

진주지역 3.1운동에는 지역에 살던, 혹은 인근에 살던 대부분의 계층이 동참했다. 농사를 짓던 농부들, 노동자, 상공업자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기생과 걸인들의 참여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걸인들은 한 곳에 모여 따로 시위를 전개했으며, 기생들은 논개의 얼과 기백을 잇겠다는 이유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는 전 계층의 시민이 동참해 3.1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18일 시작된 3.1운동으로 진주시내 각처에는 태극기가 큰 물결을 이루었고 사방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진주 중앙시장, 매립지, 법원 앞, 대안동, 봉곡동, 강변 인근 등 여러 곳에서 시위를 시작한 시민들은 오후 4시쯤 경남도청(진주시 남성동 73-10-11번지. 당시 진주성내 소재)으로 집결했다.

일제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해 군중들을 해산하려 했지만 군중수가 많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일제는 소방대를 동원해 물을 뿌리고 일제 경찰은 곤봉을 난타했지만 군중 수가 점점 많아지고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이날 경남도청에 집결한 민중 수는 2~3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경찰은 군중들에게 잉크를 뿌려, 나중에 이들을 잡아들이겠다는 작전을 폈고 해가 진 뒤 운동이 잠잠해지자 민중 가운데 일부를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고 가 감금했다.

그럼에도 19일 시위는 계속됐다. 이날 오전 11시 시민들은 큰 북과 나팔을 불며 시내행진을 감행했다. 오후 4시쯤에는 기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남강변 일대를 돌다 촉석루 방면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의기 논개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일어났다"고 외쳤다. 오후 7시쯤에는 노동독립단이 나타나 독립만세를 위치고 시가행진을 전개했고, 9시쯤에는 걸인독립단이 나타나 시위를 했다. 이처럼 3월19일 진주에서 펼쳐진 3.1운동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일어났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진주시민이 10만여 명에 불과했던 걸 감안하면 이날 시위에 2~3만 여명의 진주시민이 참여한 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1910년 12월 29일 진주시 인구는 9만548명이었다. 진주읍내 인구는 2만여 명이었지만, 진양지역 인구는 8만 명 가량이었던 셈. 3월18일 3.1운동에 진주시민 20~30%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이 장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주지역 3.1운동은 진주읍내만이 아니라 당시 진양지역이던 문산, 반성, 미천, 수곡, 정촌, 금산, 금곡, 나동 지역에서도 각기 진행됐다. 문산에서는 강찬영, 제갑석 등이 중심이 돼 3월25일 4백여명의 군중이 항일 시위를 전개했다. 반성에서는 김기업이 4월3일 시위를 주도했고, 미천에서는 박봉제, 김윤권, 노기주 등이 독립의우회를 조직 7백여명의 군중을 모아 3월20일 밤 시위를 전개했다.

수곡면에서는 당시 면장이던 심호섭이 3백여 명의 군중을 모아 시위를 주도했고, 정촌면에서는 강재순이, 금산면은 강용수가, 금곡면에서는 이고륜, 김영재가, 나동면은 박재용, 박재수 등이 주도해 시위를 전개했다.

진주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그 규모면에서 서울을 제외하고는 최대 수준이었다. 3.1운동은 당장의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향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다양한 운동들에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활동가들이 이후 형평사 등 다양한 단체를 만드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3.1운동은 이후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인도 제국의 비폭력 독립운동, 대만의 독립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다. 경남 진주에서 일어난 3.1운동이 이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 이 기사는 추경화 선생이 펴낸 ‘진주항일독립사’에 기초해 쓰여졌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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