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를 나눠 먹으며, 아내의 밥상을 생각한다"

"잘 먹을 게요. 열심히 하세요.” 피자를 배달해주고 가는 젊은이의 등에 대고 내가 한 말이었다. 이 산골에 들어오고 십이 년이 흘렀지만 이렇게 집에서 피자를 시키기는 처음이었다.

며칠 전 오후 낯선 젊은이가 마을에 나타났었다. 한 묶음의 전단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제법 많은 스티커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 젊은이가 마을을 돌아나간 뒤 우리집 우편함에 전단지가 꽂혔고 스티커 한 장이 붙어있었다. ‘지정환피자 지리산점 오픈’ 임실치즈로 유명한 지정환피자를 이 산골짝에서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김석봉 농부

“짠~ 이게 뭔지 알아 맞춰봐.” 해가 기울자 카페 문 닫고 올라온 보름이에게 스티커를 흔들어보였다. 참 경망스러워 보이는 시아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뭐예요. 그게?” “봐라. 우리 이제 피자도 시켜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정환피자 지리산점 점장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손에 쥔 스티커를 보름이에게 내밀었다. 먹을 것 하나 변변히 찾아먹기 어려운 이런 산골에 시집와서 사는 보름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집에서 배달을 시켜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면소재지 통닭이 전부였다. 자장면 다섯 그릇 이상 시키면 배달해주는 면소재지 중국집 탕수육은 맛이 없어 단 한 번도 시켜먹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배달해 주는 피자집이 생긴다니, 그것도 임실치즈로 유명한 피자집이라니 내가 다 낯이 서는 일이었다.

“그렇지? 봐라. 여기 주문전화 지역번호가 055잖아. 인월이나 산내가 아니라 경남 마천이라는 거지.” “백무동 가는 곳에 있대요. 그 피자집.” 곁에서 지켜보던 아들놈이 싱겁게 말을 받았다. 오후에 그 젊은이가 보름이 카페에도 전단지와 스티커를 주고 갔다는 거였다. 순간 나만 괜히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머쓱해졌다.

“우리 오늘 피자 시켜먹을까?” 그래서 피자를 시키게 되었고, 낮에 마을골목을 돌아다니던 그 젊은이가 피자를 배달해왔고, 우리 다섯 식구가 동그랗게 모여 앉아 오손도손 도란도란 피자를 나누어 먹었다. 서하는 피자조각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자주 시켜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밥상만큼은 세상에 남부러울 것 없는 우리밥상이었다. 내가 무농약무비료로 농사지은 식재료에 아내의 요리솜씨가 더해졌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밥상이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곤궁한 살림살이지만 밥상 앞에서는 우리 식구 모두가 행복해했다. 이렇게 차려 먹는 집이 세상에 또 있을까하며 한껏 만족감을 느끼는 밥상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아토피였고, 그때부터 아내는 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기농이 귀한 시절이었다. 화학첨가물이 범람하던 시절이었다. 아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내는 음식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저런 음식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진주에서 살 때 아내는 ‘소박한 밥상’이라는 상호로 식당을 열었었다. 생콩을 갈아 만든 콩비지찌개와 두부전골을 만들어 팔았다. 특별식으로 녹차수육을 삶았다. 장사는 그럭저럭 됐다. 단골도 꽤 생겼다. 가격도 착했다. 열 개쯤 되는 밑반찬도 인기가 좋았다. 힘들고 바쁜 나날이었지만 아내는 거의 매주 하루씩을 서울에 있는 음식연구원에 다니며 음식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자 집주인이 점포 전세금을 두 배로 올렸다. 월세도 두 배 올렸다. 두 배 오른 전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아내는 아예 서울에 올라가서 음식공부를 하기로 작정했다. 식당문을 닫았다.

“그 봐라. 내 말이 맞지. 나는 길게 줄 서서 기다리는 음식점은 절대 안 간다. 그렇게 믿음이 안 가거든.” 일전에 전국에서 유명한 제과제빵점 단속결과가 언론을 통해 발표되었을 때였다. 길게 줄 서서 기다려야 사먹을 수 있는 유명한 제과제빵점들이 줄줄이 단속에 걸렸다는 소식이었다. 대전역에서 기차시간에 쫓기며 줄을 서던 그 빵집도 뉴스에 나왔다.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모두가 ‘당연히 그럴 거야’라는 반응이었다.

“음식은 딱 팔 만큼만 만들어서 팔아야지 손님 더 온다고 더 만들고, 떼 지어 온다고 무더기로 만들어서 파는 것은 음식이 아니야.”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럼 파리만 날리는 음식점은 며칠씩 묵은 음식일 거 아냐. 그런 음식점이 싱싱한 식재료를 쓸 턱이 있나.” “프랜차이즈 음식점은 싫어. 개성도 매력도 없는 음식이잖아.” “요즘 그런 음식점 아닌 곳이 어딨다고. 김밥집도 다 프랜차이즌데.” 이러쿵저러쿵 식당이야기가 오갔다.

골목골목 수많은 식당들이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목이 좋은 자리라고 식당이 다 잘 되는 것도 아니다. 후미진 곳에 있는 식당이라고 다 문을 닫지도 않는다. 넓고 화려하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요, 작고 소박하다고 다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도립병원 후문 밖 국숫집은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경찰서 옆 으리으리한 2층 불고깃집은 허물어져 유료주차장으로 변했다. 쇠고기 다시다를 몇 포대나 쓰던 재래시장 근처 냉면집은 시내 곳곳에 분점까지 냈지만 큰길 가 그 오래된 갈치조림집은 문을 닫았다.

세상엔 줄 서서 기다리는 음식점이 참 많다. 그만큼 맛도 좋고, 품질도 좋고, 서비스도 좋아서겠지. 요리사의 정성과 철학이 훌륭해서겠지. 사장의 인품이 고결해서겠지. 돈 벌어 사회기부도 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서겠지. 정말 그래서겠지.

맛도 없고, 품질도 그다지 좋지 않고, 서비스도 엉망인데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릴 턱이 있나. 설마 대통령이나 유명한 연예인이 다녀간 집이라고 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지는 않겠지. 단지 방송에 나온 맛집이라는 이유로, 방송에 나왔다는 선전물을 보고 손님이 꾸역꾸역 몰려들지는 않겠지. 정말 그렇겠지.

아마 그럴 거야. 정직한 요리사가 김치를 담그고, 잔멸치를 볶고, 나물을 무칠 거야. 화학조미료를 뿌리지는 않을 거야. 가급적 국내산을 쓰겠지. 햅쌀을 쓸 거야. 설마 쇠고기육수에 쇠고기 대신 쇠고기다시다를 풀지는 않겠지. 멸치국물에 멸치 대신 멸치맛나를 풀지는 않겠지.

반찬공장에서 배달된 반찬을 쓰지는 않겠지. 길모퉁이 순대국집 깍두기와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유명한 삼계탕집 깍두기가 설마 같은 회사 깍두기는 아니겠지. 터미널 앞 냉면집 육수와 영화관 옆 주차장이 운동장만한 그 냉면집 육수가 설마 같은 공장 육수는 아니겠지.

지리산 골짜기 음식점이 즐비한 유원지에 나타나는 반찬트럭, 음식점마다 다니며 이런저런 장아찌와 무친 나물과 볶음들을 몇 그람씩 내려주고 간다. 그렇게 받은 반찬들을 접시에 담아내며 지리산 장아찌요, 지리산 산나물이라고 자랑한다. 내가 잘못 들은 말이겠지. 설마 그렇게까지 할라고. 설마 음식을 가지고 속이기야 할라고.

“서울 몇 시 차로 갈라고?” 매월 첫 월요일 오전 서울 음식모임에 가는 아내는 일요일 오후에 집을 나서곤 하는데 일요일 오훈데도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았다. “오늘 못가요. 내일 아침 첫차로 갈라고요.” “아니, 왜?” “오늘 민박손님이 있어요. 보름이편으로 예약을 했대요.” “몇 명?” “혼자래요.”

아내는 그 혼자 오는 민박손님에게 밥을 차려줘야 한다며 서울행을 월요일 아침으로 미루었다. 이번 화요일부터 서울의 한 생협이 조합원을 대상으로 음식수업을 하는데 아내가 강사로 예정되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아내는 그 요리수업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매월 첫 화요일마다 강의가 잡혔다. 이번 첫 강의는 장김치와 파김치를 가르친다고 했다.

아내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요일 서울행을 기다렸는데 그 한 명의 민박손님 저녁밥상을 차리기 위해 월요일 아침 첫차로 늦췄다. 그 한 명을 위한 저녁밥상이 마침내 사람의 밥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릇 식당 주인들의 밥상이 이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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