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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이되 불꽃처럼 살겠소”···진주지역 항일 의병을 찾아서

기사승인 2019.06.25  16: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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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서부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 1907년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온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오늘날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을 찍은 사진.(인터넷 검색)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옛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자(간산간수 간인간세‧看山看水 看人看世)”라고 6월 21일, 진주를 떠나 함양 안의면으로 향해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진주문화원 강동욱 향토사연구실장은 말문을 열었다.

 

▲ 함양 노응규 의병자 생가 복원지에서 바라본 안의면 소재지

진주시립 서부도서관 주최로 열린 ‘길 위의 인문학 – 진주지역 항일 의병 활동’ 답사가 강동욱 향토사연구실장을 길라잡이로 삼아 함양 노응규 의병장 생가와 남계서원, 산청 대원사 계곡 등으로 다녀왔다.

 

▲ 함양 노응규 의병자 생가 복원지

‘간산간수 간인간세(看山看水 看人看世)’는 지리산을 12번이나 올랐던 조선 중기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이 58세 쓴 유람기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선비들의 산수 유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길라잡이로 나선 강 실장도 이날 우리의 답사가 남명 선생처럼 자칫 즐거운 풍광에만 머물지 말고 너머의 역사를 살피자고 했다.

 

▲ 함양 안의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 이곳에서 좀 더 언덕을 올라가면 노응규 의병장 생가복원지가 나온다.

첫 번째 목적지인 함양 안의면 노응규 의병장 생가복원지로 향했다. 안의초등학교 뒤편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안의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을 지나자 안의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생가 복원지가 나왔다.

 

▲ 함양 노응규 의병장 생가복원지 뜨락에서 만난 망국초라고도 불리는 개망초. 나라 잃은 슬픔을 의병으로 떨쳐일어난 노응규 의병장 등을 보는 듯하다.

노응규 의병장은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이듬해 안의(安義)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려 서재기(徐再起)를 선봉장으로 하고 정도현(鄭道玄)·박준필(朴準弼) 등과 진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같은 해 부산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김해에서 패퇴하고 물러났다. 이후 진주성도 함락되고 아버지와 형이 살해되고 가산은 몰수당했다. 의병장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 함양 노응규 의병장 생가복원지 기와 지붕.

대한제국 선포 직후인 1897년 10월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 등의 주선으로 궐내에 들어가 광무황제(고종)에게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을 올렸다.

“나라에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있되 임금이 토벌하지 못하고 방백이 토벌하지 못하면 비록 미천한 선비라도 토벌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니, 대개 적을 토벌하는 대의가 임금의 명령을 받는 것보다 더 급하기 때문입니다.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 중에서-)”

 

▲ 함양 노응규 의병장 생가복원지 안채

우국충정이 담긴 상소로 사면되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렸다.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한성 경무서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옥사했다.

 

▲ 함양 안의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 신암사

생가 복원지는 휑하다. 덩그러니 있는 안내판에서 의병장의 숨결을 느끼기 어렵다. 생가 복원지를 나와 지나쳤던 안의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으로 향했다. 신암사 뒤 언덕에는 9기의 비석이 있다. 의병대장 신암 노응규 선생 순국 사적비 좌우로 함께 독립을 위해 피 흘린 독립지사들의 비석이 나란히 한다.

 

▲ 함양 안의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 신암사 뒤편에 왼쪽부터 최두원, 최두연, 임경희, 서재기, 노응규, 정도현, 성경호, 박춘필, 무명 의사 비가 서 있다.

왼쪽부터 최두원, 최두연, 임경희, 서재기, 노응규, 정도현, 성경호, 박춘필, 무명 의사 비가 서 있다. 노응규 의병장 서거일인 4월 12일 노 의병장 이하 500명의 의병 영혼을 위로하고 애국충절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 함양 안의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에서 만난 구름. 자유롭게 하늘을 노니는 구름을 보면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매켄지가 쓴 《한국의 비극》중에서)”라는 의병의 말이 떠오른다.

강 실장은 노응규 의병장 순국 사적비에 적힌 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주었다. 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기는 처음이었다. 비문을 통해 의병장 애국충절을 느끼는 기회였다.

 

▲ 함양 안의초등학교

사적공원을 나와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안의초등학교에 들렀다. 옛날 안의 현청이 있었던 교정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선생 사적비가 있다. 연암 선생이 55세 되던 1792년 현감으로 부임 5년 동안 머무렀다.

 

▲ 함양 안의초등학교 내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

현감으로 있는 동안 우리나라 최초로 안의면 안심마을에 물레방아를 설치했다. 선생이 현감으로 재직 중 지은 <열녀 함양박씨전>의 모델이 여기 안의현 서리의 딸이다. 병든 남편과 결혼한 박 씨가 혼인한 지 반 년 만에 남편이 죽자 상을 치르고 자결했다는 내용이다. 선생은 박씨전에서 박 씨의 순절을 완곡하게 비판하면서 과부의 개가 금지 제도의 비인간성을 풍자했다.

 

▲ 함양 남계서원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 곳은 진주에서 거창 가는 국도 3호선이 지나는 함양 수동면에 있는 남계서원(灆溪書院)이다. 함양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선비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의 고택과 서원 등으로 유명하다. 남명 선생이 “일두 정여창 선생은 천령(함양의 옛 이름) 출신의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며 칭송했다.

 

▲ 함양 남계서원 홍살문과 풍영루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로 경남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 함양 남계서원 연못과 풍영루

홍살문을 지나면 풍영루가 나온다. 풍영루 아래 세 칸의 다락문이 있고 가운데 정문은 ‘도를 따른다’라는 의미의 준도문(遵道門)이다.

 

▲ 함양 남계서원 풍영루에서 바라본 강당과 동‧서재

강당인 명성당(明誠堂)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서 있다. 양정은 바른 마음을 기른다는 뜻이고 보인은 친구끼리 모여 인을 얻기 위해 함께 공부한다는 뜻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의 건물로 각 1칸은 온돌방이고, 문루인 풍영루 쪽 나머지 1칸은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咏梅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만물의 존재 근거인 이치를 뜻하는 성과 사람이 우주 자연의 도를 명철히 밝혀 자기 것으로 만드는 명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 함양 남계서원 사당에서 바라본 강당인 명성당

명성당 동쪽 좁은 방에는 거경재(居敬齋)가 있다.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가짐을 조심해 덕성을 기르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서쪽에는 바깥으로 행실을 곧게 한다는 맹자의 ‘집의소생(集義所生)’에서 따온 집의재(集義齋)가 있다.

 

▲ 함양 남계서원 사당에는 일두 정여창 선생을 주벽으로 정온, 강익 선생의 위패가 모서져 있다.

강당 뒤편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언덕에 자리한다. 사당에는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 지리산 대원사 계곡

남계서원 명성당을 나와 지리산 대원사 계곡 길을 걸었다. 대원사 계곡 길은 하얀 바위틈을 돌아 힘차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시원하다. 지나는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준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 너머에 쓰러져가는 나라를 위해 의롭게 떨쳐 일어난 이름 없는 이들이 있다. 지리산을 근거지로 한 의병이다.

 

▲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속 항일의병 모습(사진=tvN)

1907년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온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오늘날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을 찍은 사진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재현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보았다. 여섯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 다섯 개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중 어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전혀 희망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바른쪽에 서 있는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엾게만 보았던 내 생각은 아마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매켄지가 쓴 《한국의 비극》에 나오는 글 일부다.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옛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자(간산간수 간인간세‧看山看水 看人看世)”라고 한 남명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는 오늘 지리산과 계곡의 물을 보면서 당시를 떠올리며 걸었다.

 

▲ 산청 지리산 대원사 가는 길. 항일 의병들은 지리산을 근거지 삼아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1만여 경남창의대라는 항일 의병이 있었다. 경남창의대는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군인 일부와 의병들이 결성한 전국 13도 창의대 중 하나였다.

 

▲ 산청 대원사 계곡

경남창의대는 1908년 3월 12일 지리산 부근 덕산에서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같은 해 3월 26일 밤 11시 산청주재소(경찰서)를 습격하고 건물을 불태우기도 했다. 경남창의대는 지리산 내 하동 쌍계사와 구례 칠불사, 산청 대원사 등을 주요 근거지로 삼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 보물 제1112호 산청 지리산 대원사 다층석탑(大源寺多層石塔)

오늘 우리가 걷는 대원사 계곡 길 2.2km는 시원하고 평화로운 아름다운 풍광이 함께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현장이기도 하다. 목숨 바쳐 항일 기치를 내건 이름 없는 의병들의 애국충절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 산청 지리산 대원사 계곡길. 평화로운 아름다운 풍광이 함께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현장이기도 하다. 목숨 바쳐 항일 기치를 내건 이름 없는 의병들의 애국충절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길 위의 인문학 – 진주지역 항일 의병 활동’을 통해 거닌 길은 다시는 슬픈 역사가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기억의 시간이었다.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다짐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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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신 객원기자 haechansol@naver.com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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