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도 에너지가 될 수 있다면

푹푹 찌는 날씨에도 PC방 순례를 빼먹지 않는 아들. 반팔 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입고 룰루랄라 집을 나서기 직전, 내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들아, 이 더위에 웬 청바지? 반바지 입어라. 보기만 해도 덥다.” 옷걸이에는 나실나실한 냉장고 반바지가 두 개나 걸려있었다. “하나도 안 더운데?” “안 덥기는. 청바지 뻣뻣한 걸 지금 뭐하러 꺼내서, 올 여름에 반바지를 두 개나 샀는데...” 잔소리가 길어질 걸 알아차린 녀석이 후다닥 뛰어나가며 한마디를 남겼다. “싫다고요, 반바지는 약해보인다고!”

사실 요즘 아들의 가장 큰 고민은 ‘살’이었다. 남들처럼 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살을 찌우지 못해서 고민. 어릴 때부터 유난히 허약해서 몸에 좋다는 한약이나 영양제도 먹여봤지만 나뭇가지마냥 앙상한 체형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별명이 ‘멸치’라고. 엄마 입장에선 웃고 있어도 울컥해지는 소리였다. 어딜 가나 인사처럼 듣는 말, ‘왜 이렇게 말랐니, 밥 좀 많이 먹어야겠다.’ 그때마다 옆에서 ‘먹는 게 다 키로 갔다’고 둘러댔지만 돌아서면 씁쓸함이 밀려왔다. 제 딴에도 그 소리가 얼마나 싫었으면 삼복더위에 일부러 긴 바지를 입고 나갈까. 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 재인 초보엄마

이후로 틈만 나면 얘기했다. “아들아, 엄마도 니 나이 때는 무지 말랐었어.” “언빌리버블!” “그지?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살이 쪘잖아. 그러니까 너도 내 나이쯤 되면~” 이 대목에서 급실망하는 아들, “아, 그럼 대체 몇 년을 더 멸치로 살아야 되냐고요!” 엄마의 나잇살 따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지, 투덜거리던 녀석이 지난 주부터 간단한 운동을 시작했다. 벽보고 팔 굽혀펴기, 플랭크 자세, 기마자세 등을 30분 정도 마치고 나면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평소 스마트폰 들고 엄지손가락만 까딱거리던 아들이 간만에 운동하는 걸 보니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근육질 팔뚝은 하루 이틀에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밤에 아무리 많이 먹고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몸무게가 그대로. 수시로 뽀빠이 팔뚝을 접어 근육을 눌러보라고 했다. 가녀린 팔뚝이 아주 조금 단단해졌다. “우와, 진짜 근육이 생겼나봐.” 나는 감정을 최대치로 표현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들은 만족하지 않는 눈치였다. “역시 나는 안 되나봐.”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물렁물렁한 물살보다는 말라도 단단한 게 좋다고 강조했지만 아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가 멸치로 안 살아봐서 그래.” “나도 말라봤다니까.” “여자가 마른 거랑 남자가 마른 건 달라요. 사람들이 보는 눈이 다르다고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보다.

“누가 너보고 말랐다고 놀렸어?” 마른 몸이 고민인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운동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해서 해 본 말이었다. 알고 보니 친한 친구가 방학 때부터 헬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신체적, 정서적으로 급변하는 열여섯 살. 지난 번 길에서 봤던 아들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어깨가 태평양처럼 벌어지고 키도 훌쩍 커서 누가 봐도 대학생 같았다. 그중 아들은 가장 마른 편에 속했다. 그렇게 덩치 좋았던 친구가 헬스까지 한다니, 얼마나 자극을 받았을지.

응원이 필요했다. “근육에는 단백질이지.” 나는 끼니마다 식탁에 고기나 두부, 하다못해 달걀 프라이라도 올리려 애썼다. 잘 먹지 않던 두부를 넙죽넙죽 집어먹는 걸 보니, 짠한 마음이 일었다. 울퉁불퉁 근육질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멸치에서만 벗어났으면.

기왕 하는 운동, 효과를 궁리하다 나도 같이 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야 덜 심심할 거 같았다. 가녀린 두 팔을 부들거리며 팔 굽혀펴기를 하는 아들 옆에서 나는 윗몸 일으키기를 했다. “올 여름엔 이 뱃살을 꼭 빼고 말겠어!” 듣고 있던 아들이 말했다. “엄마 살이 전부 나한테 왔음 좋겠다.” “그러게. 뱃살아, 다 우리 아들한테 가라.” 우리는 키득거리며 각자 운동을 했다.

그런데 윗몸 일으키기도 갑자기 하려니 허리가 아파왔다. 이내 TV 앞에 드러누웠는데 아들이 혼자 운동하며 짜증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나는 왜 멸치로 태어났냐고!” 눈은 TV를 보면서 아들에게 충고를 늘어놓았다. “짜증내지 말고, 웃으면서 해야지. 웃어 가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좋은 일이 생기는 거야. 기운이라는 게 있거든.” “엄마도 참, 그건 책에서 하는 말이고요. 나는 이게 내 에너지라고요.” 그러면서 다시 엉덩이를 내밀고 기마자세를 취하는 아들. “지긋지긋한 이놈의 멸치... ”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입으론 끝없이 멸치에게 울분을 토해냈다. 이래야 5분 더 버틸 수 있다며.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데, 영 틀린 말은 아니어서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짜증도 에너지가 될 수 있다니. 그 에너지가 너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기를. 그나저나 당분간 멸치 반찬은 못해먹겠네. 대신 냉장고에 쌓인 두부를 처리해야지. 내일 아침엔 두부 김치를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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