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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성노예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기사승인 2019.08.14  18: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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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구술기록] 하동군 출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고 김순이 할머니

7번째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은 14일 현재,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 신고된 240여 명의 할머니 가운데 생존자는 고작 20명에 불과하다. 노환 등을 이유로 할머니들이 세상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진주지역에도 일제강점기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은 분들이 적지 않다. 진주에 살았거나 연고가 있는 사람만 11명(신고자 기준)에 달한다.

이들 가운데 한 분이 고 김순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하동군 고전면 출신으로, 19세이던 1939년 음력 10월 일본 앞잡이에게 납치돼 7년간 싱가포르, 미얀마, 필리핀 등에서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감내했다. 할머니는 오랜 성노예 생활 끝에 일본군이 ‘만기제대’를 시켜줘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고향에 온 뒤 1994년 세상을 뜨기까지 후유증에 시달렸다.

김 할머니가 고향으로 돌아온 모습을 목격한 동생 김차순 씨는 당시 할머니의 모습을 1994년 이렇게 구술했다. “7년만에 돌아온 언니의 얼굴은 누렇게 떠서 죽을 상 같았고, 이빨도 까만색으로 변해 죽밖에 먹지 못했다. 깊은 기침을 끊임없이 했고, 누런 가래와 피덩이가 입과 코에서 쏟아졌다. 팔다리에는 포승줄 묶인 자국처럼 잘록잘록 들어간 흔적이 많았고, 온 몸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있었다”

또한 김 할머니가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고 했다. “조금 큰 소리가 나면 눈이 휘둥그래지며 벌벌 떨었고, 주눅이 들어 말을 크게 못했다. 편히 앉아 먹지 못하고, 밥도 눈치를 보며 먹었다. 항상 방구석에 웅크린 채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끌려가서 무얼 했냐고 물으면 군대생활을 했다고만 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평생 바지만 입었고, 몇 발자국만 걸어도 신음 소리를 냈다”

<단디뉴스>는 1994년 김 할머니와 동생 김차순 씨가 구술한 내용을 입수해 공개한다. 이 내용은 김 할머니가 강제동원되던 때부터 국내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조카 정인후 씨(현 진주시의원)가 받아 적어 문서화해둔 것이다. 1994년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는 데 큰 역할을 한 문건이기도 하다.

 

▲ 고 김순이 할머니의 생전 사진(왼쪽에서 세번째) [사진 = 정인후 진주시의원 제공]

- 1939년 음력 10월, 일본 앞잡이에 납치돼 부산항을 거쳐 성노예로 끌려가다.

김 할머니는 1939년 음력 10월 오후 5시쯤 일본 앞잡이 1명과 낯선 사람 2명에게 납치됐다. 이날 하동군 고전면 국도 2호선 도로변에서 동생이 가져다주는 볏단을 도로가에 널던 중 한 화물차가 할머니 앞에 섰다. 동네 일본 앞장이 1명과 낯선 사람 2명은 화물차에서 내려 할머니를 납치했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달려 할머니를 큰 배에 강제로 실었다. 동생 김차순 씨에게 이 소식을 들은 김 할머니의 어머니는 쓰러졌다.

배에는 전국에서 강제로 끌려온 수많은 소녀들이 있었다. 이들은 엄마를 부르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정체모를 사람들은 밖이 보이지 않는 선실 안에 갇힌 소녀들에게 체조를 시키고 여러 공연을 보여주며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한참 지나 선실을 나온 할머니는 부산항이 개미처럼 작아져 있는 걸 목격했다. 할머니를 비롯한 소녀들은 멀어진 부산항을 보며 대성통곡했다.

할머니는 여러 날 선실에 갇혀 있었다. 소녀들은 7~8명씩 나눠져 선실에 배치됐다. 선실은 똑바로 앉기도 힘들만큼 낮았고, 방 대표 2명은 교대로 불려나가 큰 그릇에 밥을 받아왔다. 선실이 낮았던 탓에 소녀들은 똑바로 앉지도 못 하고 머리와 허리를 구부린 채 밥을 먹었다.

소녀들을 태운 배는 대만과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소녀들은 기차를 기다리면서 보름 동안 정해진 숙소에서 머물렀다. 숙소 안에서의 행동은 자유였지만, 일본군은 소녀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얼마 후 그는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 부대에 배치돼 강제 성노예 생활을 시작했다.

- 강제 성노예 생활을 시작하다.

김 할머니는 산속 깊은 부대에 배치돼 나무로 지은 2층 임시 칸막이에서 강제 성노예 생활을 시작했다. 칸막이 안에는 밀가루 포대 같은 누런 종이를 깐 나무 침대와 모포 하나가 전부였다. 낮에도 칸막이 안은 깜깜했다. 밤에는 불빛이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 아주 작은 불빛만이 켜질 뿐이었다. 칸막이 밖 입구에는 군인들이 손을 씻는 소독물 세숫대야가 있었다. 군인들은 고무풍선(콘돔 종류)을 이용했다.

김 할머니는 낮에는 일본군 졸병들을, 밤에는 높은 계급의 군인들을 받았다. 주말이면 일본군들이 밖에서 줄 서 기다리는지 사람이 나가면 들어오고, 나가면 들어왔다. 일본군은 아프면 부대 병원에 보내 주사와 약을 주기도 했다. 끼니 때가 되면 종을 쳐 알렸다. 밥을 먹고 나면 일본군 감시 하에 다시 어두운 나무 칸막이로 돌아왔다.

일본군은 미군이 폭격하면 두 귀를 막으라고 당부했다. 폭격을 알리는 싸이렌이 울리면 굴 속으로 숨었다. 어느 때는 밥을 먹다가, 또 어느 때는 밥그릇을 든 채 굴 안에 숨어 귀를 막고는 했다. 김 할머니는 이후 부대이동에 따라 미얀마(버마) 양곤으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계속했다. 이곳에서는 일본군의 피 묻은 붕대도 씻었다. 군인은 모두 일본사람이었고, 성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하루는 일본군 졸병이 조센징이라며 놀려대 소독 세수대야를 2층에서 1층으로 던졌다. 헌병대는 돼지우리 같은 곳에 할머니를 하루 동안 가두고 종일 굶겼다. 반성문을 쓰고 나왔지만, 일본군이 할머니를 '만기제대'시킬 때 당시 일이 붉은 글씨로 전과기록처럼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이후 다시 필리핀 어느 섬으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 ‘만기제대’로 성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지만, 험난한 귀향길

7년간의 성노예 생활 후 일본군은 김 할머니를 ‘만기제대’시켰다. 제대할 때 큰 부상을 당한 일본 군인들과 함께 부대를 나왔다. 싱가포르로 향했다. 한 달 후 커다란 군함이 왔다. ‘만기제대’한 성노예 피해자들과 부상병들이 타고 있었다. 650여명 정도 됐다. 전쟁에서 죽은 일본군 유골 상자를 하루 종일 배 2층으로 운반했다.

군함은 작은 배 17척과 일본 비행기가 호위하는 가운데 항해를 시작했다. 다른 배에 탄 우리나라 생존자를 확인하면 옷을 흔들어 생존의 기쁨을 나누었다. 배안에서는 배가 침몰하면 취해야 할 행동들을 매일 훈련받았다. 배가 침몰되면 높은 곳으로 가라는 것, 구명조끼 격인 기미도부꼬를 입는 법, 여러 명이 밧줄을 잡고 생존하는 법 등을 배웠다.

항해 20여일쯤 되던 날 미국 잠수함이 공격해와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김 할머니는 배가 옆으로 기울자 훈련할 때 배운 대로 구명조끼를 입고 높은 갑판으로 향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다리를 잡아당겨 물속으로 여러 번 빠졌다 나오길 반복했다. 그러다 배가 폭발하며 뒤집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다.

물 위에서 24시간쯤 나무조각를 잡고 떠 있으니 일본군 배가 와 생존자를 구조했다. 김 할머니도 구조됐는데 일본군이 생존자들을 고기 집어던지듯 해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구조된 채 바다를 보니 시체가 수없이 많았다. 일본군은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는 곳만 구조활동을 하고, 3~4명이 모인 곳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할 때 18척이 되던 배는 거의 다 폭발했다. 파손 되지 않은 한 척과 뒷부분이 불에 타 반쪽만 남은 배 한 척이 남았다. 650여명 가운데 150여명 생존한 사람들을 실은 배는 보루네오 어느 섬 산속으로 들어가 약 6개월가량 숨어 지냈다.

섬 생활은 힘들었다. 먹을 게 없었다. 구렁이, 도마뱀, 개구리를 잡고 바나나 나무줄기, 풀을 뜯어 먹었다. 배가 고프니 그런 것들도 맛있었다. 소금 섭취를 못해 시퍼런 물집이 생기고 그게 터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물이 마시고 싶어 물을 찾아 나서면 그 옆에 시체가 떠있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 물을 마셨다.

칼 달린 총을 지닌 일본군 생존자들은 아픈 군인들을 먹이려 벼줄기를 꺾어 오곤 했다. 그들은 그걸 찧어 죽으로 만든 뒤 먹었다. 먹다 남으면 소녀들에게 배급했다. 김 할머니는 미국의 연이은 폭격으로 시체가 나뒹굴고, 맨발로 산속을 다녀야하는 상황에서도 고향에 가기 위해 모든 걸 감내했다. 발가락 사이에 시체 구더기가 끼이고, 시체 옆에서도 잠을 자면서도 고향에 갈 생각만 했다.

한번은 현지인이 버리고 도망간 집 2층에서 자다가 미군 비행기 폭격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를 듣지 못해 뒤늦게 일어났다. 살기 위해 2층에서 바로 뛰어 내렸는데 이빨이 거의 다 깨졌다. 폭탄 파편이 다리에 박혔다. 할머니는 구술 당시(1994년) 지금도 파편 조각이 잡힌다며 다리가 아프다고 증언했다.

김 할머니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살아나자 할머니 옆에 있으면 안 죽는다는 소문이 일었다. 사람들이 할머니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 다녔다.

- 미국 비행기가 뿌린 삐라를 보고 해방을 알다. 미군이 할머니를 구조하다.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미국 비행기가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고, 우리나라는 해방됐다는 삐라를 뿌렸다. 할머니는 이 삐라를 보게 됐고 이후 미군들이 산 속에 군용차를 타고 와 할머니와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미군은 소녀들을 먼저 태우고 남은 자리가 있으면 일본군을 태웠다.

미군 천막에서 김 할머니는 6개월간 포로로 생활했다. 식사도 잘 나왔고, 미군들은 김 할머니를 비롯한 소녀들에게 인간대접을 해줬다. 포로기간 동안 한국 사람이 조사관으로 와 활동했다. 포로기간이 끝나고 미군은 할머니를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으로 갈 때 일본군은 함께하지 않았다. 미군이 소녀들을 보호했다.

김 할머니는 일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다. 부산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진주로 갔다. 미군은 곤양면까지 할머니를 버스로 실어줬다. 곤양에서 진교 외가까지 산길을 따라 걸어갔다. 죽은 줄 알았던 손녀가 살아오니 외가는 온통 울음바다였다. 다음날 밤 걸어서 고향에 도착했다. 온 식구가 대성통곡했다. 하동군 고전면 일대가 떠들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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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종 기자 how2how2live@daum.net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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