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같이 마실모임] 하동읍내장을 가다

대추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리길을 걸어 열하루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뿐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

송편같은 반달이 싸리문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뿐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노천명 시인의 시가 가만히 읊조려지는 시골 장, 내가 어릴 적 손꼽아 기다리던 합천장날은 3,8장이었다. 없는 살림이라 장날마다 장에 가시지는 않아도 간혹 장날이라 나가시면 언제 오시나 골목길을 내다보며 기다렸다. 엄마가 장에 다녀오시면 그 장바구니를 얼른 받아서 뒤적거리곤 했다. 막내딸을 위해 특별히 사 오시는 것은 없었지만, 간혹 비린내가 나는 갈치 동가리가 있기도 하니 밥상이 달라지는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마냥 기다리기만 하던 그 장날이 하교길 놀이터가 되었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 장터 골목을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였다. 어쩌다가 돈을 조금 손에 쥐기라도 하면, 풀빵에 팥죽을 붓고 설탕을 듬뿍 뿌려주는 풀빵 집에 달려가기도 했다. 그런 추억을 같이 지닌 친구들과 만나면 그 풀빵팥죽 이야기를 하며 입맛을 다시곤 한다.

시골 오일장은 그 동네마다 가진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또 찾는 그 때마다 나오는 물건에 변화가 있다. 편의점이나 마트에는 없는 무언가가 제법 있고 철따라 바뀌어 놓이는 시골 장터는 그야말로 그 지역만의 맥박이 뛰는 생명체다. 그것을 느끼는 재미로 오일장이 서는 곳에 종종 발길을 옮기게 된다. 어릴 적 추억을 더듬기도 하며 오일장 구경을 나서게 되면 온갖 시름 다 잊고 어슬렁거리게 된다.

‘마실 모임’에서 움직인 시월의 그날은 27일이다. 다들 바쁜지 몇 명 안 되어 차 한 대로 움직여서 2,7장이 열리는 하동읍내장으로 갔다. 하동장날이 가진 냄새와 빛은 어떤 것일까? 섬진강과 함께 살아온 하동읍내 사람들은 어떤 장터 풍경을 만들어 놓았을까? 합천산골과는 많이 다른 환경인 하동, 장에 나오는 물건도 아마 아주 다르겠지?

섬진강 모래밭 옆에서 마을을 이루어 삶을 가꿔 온 하동사람들, 그래서 삼국시대 때 지명이 한다사(韓多沙)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하동장터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만난 귀한 버섯들 좌판 앞에 저절로 발길을 멈추었다. 익히 아는 이름인 영지버섯도 있고 온갖 버섯이 놓여 있다. 결코 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봉지가득 사가는 것은 그 버섯의 가치를 알아서겠지. 우리 일행 중에서도 누군가가 버섯들 옆에서 얌전한 자세로 주인을 기다리는 산양삼을 한 봉지 가득 담는다.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이 밴 좋은 보약이 되겠지.

 

▲ 가을은 버섯의 계절 [사진 남여경]

가을이 깊어져 가는가 싶은데 신발전에는 벌써 털신이 나와 있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말 커다란 대봉감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도 있다. 어느 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전도 좋지만 여기 하동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전이지 싶은 곳엔 눈길이 한참 머물게 된다. 섬진강에서 잡았을까, 털게와 재첩이 곳곳에 가득 놓여있다. 일행이 털게 한 대야를 산다. 갯가 생물은 만질 줄 모르는 나로서는 저것을 어떻게 요리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딸내미가 좋아하는 브로콜리는 아주 싱싱한데 4개에 5천원이라는 엄청 싼 값이다. 나중에 장터를 나갈 때 사야지. 단감은 진주에서도 살 수 있으니 건너뛰고.

현대식으로 잘 정리된 장터는 넓고 깨끗하지만, 동서남북을 알 수 없었다. 누가 보면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장터 한복판에 먹는 샘물이 가득 담긴 우물도 있고, 난전을 편 할매들이 도시락을 꺼내 끼니를 때우는 모습도 보인다. 그야말로 호박같이 생긴 호박이 햇살을 받으며 달달하게 유혹한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돌배도 눈에 띈다. 앗, 섬진강에서 잡은 재첩을 커다란 솥에서 폭 고는 광경을 만난다. 먹음직스레 뽀오얀 하동재첩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재첩 한 포대로 재첩국을 얼마나 고아내는지 궁금하여 물어보니 서 말을 곤다고 하신다. 한 솥에 재첩이 서 말 들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고 물 서 말에 재첩 한 포대가 들어가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재차 여쭤보기가 어려웠다.

 

▲ 장터 한복판에 있는 가득찬 우물 [사진 남여경]

토요일에만 열린다는 두꺼비 야시장도 있다. 일요일에 간 우리는 아쉽게도 그 흥겨운 야시장 구경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커다란 황금두꺼비한테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니, 귀한 로또번호를 내준다. 아직 로또는 안 샀는데 조만간 그 번호 들고 가볼까 한다. 섬진강 수호신인 황금두꺼비의 전설을 품은 그곳에서 재복과 행운을 얻어왔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

장 구경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앉을 곳을 정하지 못해 한참을 돌아다녔다. 십여 년 전 몇 번이나 와서 맛있게 먹던 팥칼국수 집을 가고 싶어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현대식으로 바뀌고 보니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작년에 출장 와서 들렀던 식당도 어디에 붙어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게 헤매다가 한 집을 정했다. 장터에 들어설 때 흥겨운 노랫가락이 뽑히고 있던 곳인데 막걸리로 목을 가볍게 축이기엔 제격이다. 시락국 세 사발과 감자전 한 접시에 마신 고전막걸리는 담백해서 모두가 만족해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다들 맛있게 먹다가 거기서 배를 채울 수는 없어 일어났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지역마다 특색 있는 가리장은 밥도둑도 되고 배도 불려주었다. 합천산골에서 자란 내가 먹던 가리장은 마른 멸치를 곱게 다져서 볶다가 총총 썬 고추와 간장을 넣어 달이듯 끓였다. 고추가리장이다. 하동에서 점심을 먹으려면 참게가리장을 놓칠 수 없다. 들깨가루나 찹쌀가루를 넣어서 먹던 토란국과 비슷한데 거기에 참게를 갈아서 넣은 것이 아주 별미다. 참게가리장을 맛있게 하는 집에 갔다. 어린이들도 맛있게 먹고 반찬접시도 싹싹 비우고 나왔다. 그 지역의 맛을 잘 살려낸 식당이 진짜배기 맛집이다.

 

▲ 참게가리장 [사진 정은설]

읍내 작은 카페에서 산 커피를 들고 송림으로 들어갔다. 솔밭으로 들어서는 입구, 섬진강 둔치에 동산처럼 쌓아 둔 모래더미 위에서 아이들이 자동차와 중기로 보이는 장난감으로 소꿉놀이도 하고 미끄럼도 타며 논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가장 사랑스럽다. 이제 휴식시간이다. 누구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쉬고 누구는 또 다른 벤치에 눕는다. 아이들을 데려온 누구는 하동 생태해설사회에서 봉사 나온 선생님과 자연학습을 즐긴다. 어릴 적 우리가 즐기던 비석치기도 체험해 본다. 섬진강이 지켜봐 온 하동의 근현대 모습이 담긴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하동의 숨결을 느껴보기도 한다.

우람한 솔밭을 잘 지켜내고 가꿔 온 하동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복잡하고 고민되던 생각들을 모래밭에 던져두고 솔밭이 주는 싱그런 휴식을 얻는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린다. 소나무 어디에도 스피커가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등걸처럼 만들어진 의자다. 등걸모형 옆으로 작은 구멍들을 내어놓고 소리가 통하게 해 뒀다. 산책하다가 잠시 앉아 쉬게 만드는 공원 의자를 이렇게 등걸로 자연스레 해 둔 것도 좋은데 거기 스피커를 숨겨뒀구나. 발상과 시행이 대단하다. 다시 눈을 돌려 둘러보니 쓰러진 나무나 베어낸 나무를 정말 자연스레 활용하고 있다. 여럿이 함께 걸터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많고 등걸도 많다. 산보하는 길도 모래흙이나 톱밥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지나치게 인위적이거나 현대적인 재료로 편의를 도모하지 않아서 참 좋았다.

어느 따스한 날, 다시 하동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가 송림에 가서 쉬고 싶다.

 

▲ 하동읍 송림 풍경 [사진 남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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