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냥 두세요. 괜찮아요” 열심히 냉장고를 닦는 아내 곁에서 보름이가 말했다. 애가 타는 듯한 말투였다.

“이게 내 얼굴 같아서 그러는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장고를 닦았다. 속을 다 비운 냉장고는 깨끗하게 변하고 있었다.

오늘 새 냉장고가 들어오는 날이다. 오후 다섯 시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아내는 날이 밝자마자 냉장고를 비웠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닦기 시작했다.

스무 해 넘게 써온 냉장고였다. 냉장고는 낡을 대로 낡아 아래쪽은 온통 벌겋게 녹이 슬었다. 고무테가 닳아빠진 문틈엔 테이프를 발라 흉해 보였다. 안쪽은 기름때가 끼어 누렇다 못해 거무튀튀했다.

▲ 김석봉 농부

“기사들은 이보다 더 험한 냉장고도 아무 말 없이 치워준다니까” “그래요, 어머니. 어차피 쓰레기일 뿐인데 뭐한다고 닦아요” 한 손엔 세정제를, 한 손엔 걸레를 든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내가 허리를 폈을 때 그 낡은 냉장고는 새 냉장고만큼이나 깨끗해 보였다.

“이 냉장고를 내가 얼마나 아꼈는데. 이 냉장고를 들이기 전에는 재활용 냉장고만 썼었거든. 걸핏하면 고장이고, 서너 해마다 냉장고를 바꿔야 했지. 그러다 이 냉장고가 들어온 거야. 내가 어떡했게? 부엌에 두면 기름때 낀다고 거실에 두고 썼어.”

아내는 쓰던 냉장고와의 이별을 앞두고 회한에 젖고 있었다.

가난했던 아내는 시집오면서 냉장고 한 대 변변히 챙겨올 수 없었다. 삼 호봉 말단 공무원 봉급으로 냉장고 한 대 장만하기 어려운 세월을 살았다. 남이 쓰던 냉장고를 물림해서 받아써야 했다.

공무원으로 더 오래 살았으면 새 냉장고로 쉬 바꿨을 수 있었으련만 여섯 해도 채우지 못한 채 나는 공직을 떠났다. 그러고는 돈을 버는 일과는 담을 쌓고 살았으니 새 냉장고를 장만하는 꿈은 멀어져 갔다.

결혼하고 스무 해 쯤 되던 그해 가을, 삼 년 동안 푼푼이 모아 부은 적금을 탄 아내는 내겐 일언반구도 없이 새 냉장고를 장만했다. 그 무렵 세상에 선보이기 시작한 양문형 냉장고였다.

열다섯 평 전셋집 비좁은 거실을 비집고 들어선 냉장고는 웅장했다. ‘하루 세 번 이상 문 열지 말 것’이라는 표어를 큼지막하게 써 붙이고, 하루 대여섯 번씩이나 닦아주던 냉장고였다.

산그늘이 마당을 벗어나 건너편 산허리에 걸렸을 때 새 냉장고가 도착했다.

기사는 어둡기 전에 설치하고 돌아가야 한다며 일을 서둘렀다. 아내가 하루 종일 닦아둔 냉장고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냉장고 그 둔중한 몸체는 집안 여기저기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기사들의 우악스런 손놀림을 지켜보던 아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부엌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았던 냉장고는 순식간에 끌려나와 마당에 내동댕이쳐졌다. 우당탕 강한 금속음과 함께 문손잡이가 찌그러져버렸다.

헌 냉장고가 있던 자리에 새 냉장고가 자리를 잡았다. 요즘 나오는 최신형 냉장고였다. 에너지효율도 2등급이었다. 실내등도 크리스털 조명으로 은은했고 신선야채실 문도 따로 있었다.

“우와. 어머니. 새 냉장고 멋져요. 축하드려요.” 보름이가 더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이 냉장고 다 쓰고 바꿀 때까지 살려나?” 나도 덩달아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살을 붙였다.

그러나 아내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걸레를 들지도 않았고, ‘하루 세 번 이상 문 열지 말 것’이라는 표어도 붙이지 않았다. 새 냉장고에 정신이 팔려 이리저리 살펴보는 사이 쓰던 냉장고는 애물단지가 되어 마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내의 발길도 문밖까지 따라가고 있었다.

“언제 짬 내서 휘근이에게 이 말을 해야겠어.” “무슨 말?” “이 마을, 여기 이 집은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거잖아. 휘근이와 보름이 에겐 안 맞을 수도 있겠다싶어서.”

“보름이는 여기 사는 거 좋아하는데?” “그럼 괜찮지만 그래도 저희들은 저희들이 살기에 더 좋은 곳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건 그렇겠네.” “그래서 말인데, 살다가 어디 마음에 드는 좋은 자리가 있고 형편이 되면 그리 하라고 말해야겠어.” “우리끼리 늙겠네?” 아내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낡은 냉장고가 나간 길을 따라 새 냉장고가 들어와 자리 잡은 날 아내와 나눈 대화는 이랬다. 불현 듯 낡은 이 자리는 낡은 우리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다 이 세상을 떠나면 이 자리는 마냥 캄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저들에겐 더 새롭고 밝고 좋은 터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짙은 회색 냉장고가 그늘 속에서 더 검게 보였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