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국이 달린 유라시아 38,000km #5

* 이 여행기는 <경북매일>에 함께 연재하고 있습니다.

◇ 자유시 참변의 현장을 찾다

 

▲ 네르친스크에서 치타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도로.

출발하자마자 주인아저씨가 알려준 에어 펌프가 있을만한 주유소로 갔으나 허탕, 다른 주유소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른 아침이라 자동차 정비소는 문을 열기 전이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마지막 주유소에 가서도 에어 펌프는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휘발유를 넣는 동안 내게 어디서 왔느냐 질문을 던진 노신사가 직원과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비를 피해 하룻밤 보낼 수 있었지만 타이어 공기압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공기가 반쯤 빠진 타이어로 장거리를 속도를 내어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신사는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꼼뿌레샤!”를 꺼내 깊은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의 차 트렁크엔 웬만한 공구들이 다 실려 있었다. 하긴 인적 없는 시베리아 들판에서 고장이라도 난다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비사나 견인차를 부르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테고 부르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간단한 정비는 다들 스스로 하겠지. 공기를 가득 넣은 만큼 자신감도 불어났다. 어제만 해도 달리면서 조마조마했었는데 불안감이 완벽하게 가셨다.

시베리아를 지나며 구체적인 경유지를 딱 한 곳 정했었다. 옛날 ‘자유시’라 불렸던 스보보드니. 그곳 역에 있는 급수탑이 경유지였다. 시베리아 횡단 메인도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긴 했지만 자유시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 1921년 6월 28일 독립군이 소비에트 적군에게 공격받아 학살당하고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혀 독립군 조직 자체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던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

 

▲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스보보드니 역 급수탑. 많은 독립군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자유시 참변으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 적군에게 붙잡혀 카자흐스탄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승리로 기세를 올렸으나 독립군은 항상 변변한 무기조차 구하기 힘든 나라 잃은 군인이었다.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고자 찾았던 자유시에서 오히려 큰 화를 당하고 이후 다시 투쟁을 위한 대오를 갖추기까지 많은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당시 소비에트 적군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길 포기하고 그들의 회유에 만주 일대에서 모여든 독립군을 오히려 무장 해제시키려 했다. 아직 왕정 복고를 노리는 백군과의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군을 지원하는 건 무리였다. 오히려 일본의 공격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뿐 아니라 독립군 내부의 주도권을 놓고 일어난 내분도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었다. 스보보드니 역 급수탑 주변은 소비에트 적군의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한 독립군이 당시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다.

스보보드니 가는 길은 황량했다. 100년 전 독립군들은 나라를 떠나 이역만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왔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천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왔지만 동료들과 소비에트 적군의 배신으로 눈물을 삼키며 흩어져야 했다. 스보보드니는 시라고 하기에도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도 포장 상태가 엉망이었고 건물들도 세월이 오래 전 멈춰버린 듯 낡아 있었다. 역사의 현장이었던 급수탑도 마찬가지. 육교 위에 서서 급수탑과 역 주위를 살피니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옛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곳에서 독립을 위해 총칼을 들었던 용감한 청년들은 몇이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스보보드니를 벗어나며 그 시절 독립군이 불렀다는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을 가만히 읊조렸다.

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

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몽고 땅

흐르고 또 흘러 부평초 같은 몸

고향을 떠난 지 그 몇 해 이런가

석양 하늘 등에 지고 달려가는 독립군아

남아 일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어라.

 

◇ 먼저 떠난 젊은 여행자들을 만나다

 

▲ 간이 버스정류장에서 버너와 코펠을 꺼내 자주 끼니를 때웠다.

제야강(흑하)을 다시 거슬러 올라 모고차로 향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와 비바람 때문에 결국 모고차까지 가길 포기했다. 800킬로미터쯤 달려 숲이 첩첩 겹친 작은 마을 예로페이라는 곳에 멈추고 숙소를 찾아 들어왔다.

종일 비가 오다 숙소에 들어올 때쯤 그쳤다. 이놈의 비. 예전 빗길에 미끄러진 아픈 기억이 있어서 빗길 주행은 항상 피곤하고 몸이 빨리 굳는다. 힘을 빼고 타야 오래 달릴 수 있는데 커브길이나 비포장길을 만나면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달리다 쉴 때는 커피 한 잔 끓여 마시는 게 즐거움이다. 집에서 아이들 컵라면 두 개를 몰래 가져와 아껴 두었는데 밥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하나 꺼냈다.

아우 성진이 선물로 챙겨준 칼로리바는 출출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었다.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자에겐 정말 탁월한 선물인 듯. 치타에 가까워질수록 초원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자연 환경이 바뀌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좀처럼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 드넓은 지형을 만나면 괜스레 가슴이 뛴다.

예로페이에서 하룻밤 묵고 네르친스크를 향해 달리다 일주일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먼저 도착해 출발한 팀을 만났다. 20대 청년 다섯 명이서 스쿠터를 타고 포르투갈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숙소를 잡고 밥을 얻어먹고 대신 맥주를 샀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멀리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두고두고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 동해항에서 일주일 먼저 출발했던 '스쿠터 팀'을 네르친스크 근처에서 만나 하룻밤 같이 묵었다.

예로페이에 오기까지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배기량이 큰 오토바이로도 쉽지 않은데 작은 스쿠터로 달리며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경험을 쌓았다. 중고로 구해온 친구들의 스쿠터는 언뜻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젊은 ‘스쿠터 팀’은 얼마 남지 않은 대도시인 치타에서 정비하고 몽골로 넘어 갔다가 유럽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

예보대로 다음 날도 비가 내렸다. 냉기가 가득한 봄비. 해가 지면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다. 오는 길에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도 봤다. 더는 비를 맞으며 달릴 마음이 없었다. 이미 많은 비를 맞으며 왔고 떠나온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로했다. 4일 만에 3천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달렸으니. 일주일 전에 출발한 친구들을 따라잡았다는 건 그만큼 무리했다는 증거였다. 비가 그칠 때까지 며칠이든 쉬기로 마음을 굳혔다.

‘스쿠터 팀’은 다음 여정을 위해 치타로 출발했다. 마음 편히 쉰다고 생각하니 여유가 생겼다. 모든 짐을 풀어놓고 다시 정리했다. 가져왔을 거라 생각했던 예비 안경을 놓고 온 것과 또 몇 가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읽고 참고할 모든 자료들을 고장난 휴대폰에 넣어왔으니 그냥 그때그때 얻은 정보들로 일정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오히려 결정을 머뭇거리게 만들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이틀 전에 묵었던 곳처럼 네르친스크의 숙소도 건물만 컸지 휑했다. 원래 주유소까지 운영했던 곳이었는데 주유기는 버려진 채로 있다. 카페 영업으로 겨우 버티는 느낌이다. 대부분 횡단도로의 숙박업소는 카페를 겸하고 있다.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이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진 9천킬로미터가 넘으니 아직 3분의 1도 가지 않은 셈이다.

별 문제가 없다면 보름 정도면 러시아를 통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 단정할 수 없었다. 숙소 벽에 네르친스크의 옛 모습을 담은 복사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쇠사슬에 묶인 수형자들 사진에 눈길이 오래 멈췄다. 동토의 땅에 철로와 도로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확장과 개발은 언제나 폭력과 강제를 동반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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