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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월민주항쟁 진주6․26평화대행진의 과정과 의미

기사승인 2020.05.29  13: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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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민주항쟁 33주년에 즈음하여

1987년 진주유월민주항쟁의 역사에서 ‘6․26국민평화대행진'(이하 진주6․26평화대행진)은 하마터면 묻힐 뻔하였다. 「서부경남유월민주항쟁약사」(진홍근)가 첫 기술인데, 김주완(경남도민일보) 등 몇몇 후술들이 이 문건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서부경남유월민주항쟁약사」는 유월민주항쟁 20주년행사에 즈음하여 급히 제출된 소책자 형식의 문건이었다.

6‧26평화대행진은 전국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유월민주항쟁과정에서 가장 큰 마지막 군중운동이었으며, 특히 진주6․26평화대행진은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경찰이 봉쇄한 가운데서도 한 세대 뒤에나 이어질 촛불시위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평화적 군중집회의 씨앗을 성숙한 과정과 완성된 형태로 보여주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진주6․26평화대행진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먼저 살펴보자.

▲ 진홍근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

배경은 이렇다. 1987년 6월 15일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풀면서 주춤했던 시위가 6월 17일 우연찮게 남해고속국도 점거시위와 LPG가스수송차 징발로 다시 점화되고, 이날 시위를 매개로 부산, 광주, 전주 등 전국적 들불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정작 진주에서는 조기방학(사실 여부를 떠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렇게 믿었다)에 들어가면서 6월 18일 경상대집회가 가좌동 경상대 교문시위에 제한되고(이날 진주교대 학생 500여 명이 학내 집회를 가졌다), 그 후로는 공백상태에 머물렀다.

사실 1987년 당시 6․26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지휘부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조차도 고심 끝에 겨우 결정한 것이었다. 야당 쪽에서는 비상조치 등 군의 개입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으며(1986년 하반기부터 이미 전두환은 장세동을 앞세워 비상조치를 운운하며 정치협박을 통치기술로 적극 이용했다), 재야 진영에서도 일부는 회의적이었다. 국본 구성원들은 일사분란하지 못했으며 대회 주최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중단시킬 목적으로 종교계 인사들과 시국수습에 관한 간담회를 여는 한편, 이희호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김대중 등에게 군의 개입 가능성을 흘렸다. 이것은 「서중석의 현대사이야기 - 6월항쟁」(프레시안)을 보면 그렇고,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4 - 활화산 6월항쟁 속 횃불 든 민청련」(민청련동지회)을 봐도 알 수 있다.

전자에 따르면 김영삼(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 국본 대표들을 만나서 평화대행진 날짜 발표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후자에 의하면, 황인성(지난 총선 사천‧남해‧하동 지역구 민주당 후보)등 기독교 쪽에서 미적거렸으나 민가협(인재근 고 김근태 선생의 부인이자 현 민주당 의원) 등이 강하게 밀어붙여 성사되었다. 또한 6월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회담이 결렬된 것도 변수였다.

물론 나는 당시에 이런 내막을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 해도 나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시민들의 군부독재에 대한 혐오와 민주주의에 대한 절절한 요구를 읽었기 때문이다. 가좌동 학내를 훑어 6월 26일 11:00시경 민주광장에 30여 명의 학생을 모았다. 경상대 교내는 한산하고 썰렁했다. 참여한 학생 수도 적었다. 위축될 것을 우려하여 한바탕 해방 춤을 추고 기차놀이도 하며 긴장을 풀었다. 마침내 나는 비장하게 연설했다.

“시민군중이 시내에서 기다리고 있다. 완전무장한 전경을 따돌리고 시민과 결합하는데 우리 30명이면 충분하다. 전조 10명, 후조 10명 그리고 정찰조 10명이면 끝난다. 단 한 가지 이 속에 프락치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망한다. 돌아가면서 서로 악수하고 이름을 교환하자. 얼굴과 이름을 천번 만번 외우자. 이렇게 서로를 완전히 기억하자. 만약에 프락치가 있다 해도 이 자리서 마음만 바꾸면 된다.”

14:00시쯤 정각 진주 중앙시장 진주대로 건너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진주지점, 경남 진주시 대안동 14-8) 옆길. 동(動) 뜨는 첫 위치와 시각(時刻)을 철저하게 보안에 붙여야만 했다. (당시 우리는 시위의 시작점을 ‘동을 뜨다’고 했다) 가벼운 차림의 사복경찰이 있었지만 백골단 같은 체포조가 체계화되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또한 전경대열은 우리 쪽 전위의 화염병 등을 대비하느라 전방을 향해 완전무장을 했으므로 전면이 강했으나 배후가 약했으며 빠르게 이동하기도 어려웠다.

진주시내 상업은행 옆 도로에서 30여 명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전조와 후조를 결성하자 시민들이 모이면서 삽시간에 200여 명으로 대열이 불어났다. 전경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광경을 곱씹으며 계획된 동선을 따라 진주대로를 가로질렀다. 시민시위대가 중앙시장을 천천히 휩쓸고 동명극장(현 진주고용센터, 진양호로 563 안성빌딩) 쪽으로 빠져나가 다시 중앙로타리(현 중앙광장사거리)로 밀고 올라왔다. 어느새 시위대는 벌써 1천 명을 훌쩍 넘겼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시위대의 이동 속도가 중요했다. 완전무장한 전경대열이 겨우 따라붙을 정도로 빨라야 하지만, 교감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잘 붙을 수 있을 만큼 너무 빠르지 않아야 했다. 시민들의 요구가 있다면 무에서 유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진주극장(현 진주시 대안동 ‘몰에이지 1030’쇼핑몰) 앞까지 돌아올 때 3천 명을 충분히 넘는 시민군중이 모였다. 전두환의 수족노릇을 하던 경찰에 대하여 헤게모니(주도권)를 확보하면 일시적으로 해방공간을 열고 집회를 하였다.

이때 요점은 집회를 무리하게 진행해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경찰에 의해 포위・봉쇄・고립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다 → 커지다 → 서다 → 집회하다 → 막힐 것 같다 → 다시 움직이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포위・봉쇄・고립 속에 머무는 연좌농성과는 완전히 다른, 시민군중과 함께 움직이며 고락을 같이하는 도시 기동전이다.

한편 16:00시경 신부, 목사, 민주당 당원들이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장대동 동명극장과 (구)부산교통터미널 사이에 집결하여 ‘군사독재 타도하여 민주헌법 쟁취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진주극장 앞 해방공간으로 결합했다. 핵심역량을 둘러싼 시민군중, 다시 시민을 지키는 사수대(死守隊), 군중을 포위한 경찰 등이 방사형으로 집결하였다. 경찰의 봉쇄 속에서도 6․10대회 이후 시내 한복판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권재명 선생(당시 해직교사)이 나서서 국본서부경남지회가 창립되었음을 선포했다. 물론 경찰이 봉쇄하고 외곽군중들을 떼어 내면서 시위대 핵심역량을 고립하려 하므로 시위대는 다시 움직여야 했다. 서서히 중앙광장, 진주교 쪽으로 움직이면서 틈틈이 약식집회를 했다. 군중 속에서 연설가들이 생겨나고 투쟁방향과 구체적인 동선(動線)까지 제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참으로 유월민주항쟁은 ‘민주주의의 학교’였다.

18:00시경 제일병원 앞에서 다시 군중집회를 열었다. 개사곡 경연대회 등 군중들이 역량을 총동원하여 각종 문화행사를 스스로 벌이는 동안 1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고속터미널, 고려병원, (구)역광장, 제일병원을 꽉 메웠으나, 단지 셀 수가 없어 그저 1만 명 이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시위군중이 대열을 가다듬고 1만여 명의 군중이 투쟁의 예각을 세운 것은 20:00시경이었다.

10여 명이 사람 말을 만들어 현장 지휘부(진홍근, 경상대 의과대학 83학번, 당시 휴학 중)를 태우고, 20여 명의 보위대가 러닝을 벗어 횃불을 만들었다. 연설은 이랬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고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전위대 횃불은 지휘부를 따르고 군중은 횃불을 보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자. 지휘부를 따르지 않는 횃불은 프락치고, 횃불을 따르지 않는 군중도 프락치로 간주한다. 프락치는 시위대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오늘 우리는 진주경찰서로 가서 연행자들을 풀고 진주교도소(현 상봉동 한주아파트 자리)의 문을 열며, 법원진주지원(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취업‧창원센터)과 진주시청(현 진주청소년수련관)을 접수한다. 내일은 완전한 민주의 세상이다. 먼저 진주경찰서로 진군하되 100보를 걷고 10분 정지하여 연행자 석방을 요구한다.” 이승홍 신부님(당시 하대성당)이 시위대 사절을 자임하셔서 경찰서장과 담판을 짓는 동안 시위대는 천천히 흩어짐 없이 세를 불리며 경찰을 진주경찰서 쪽으로 밀었다. 시위대가 진주교 허리까지 전경을 밀어 붙일 쯤 연행자들이 풀려났다.

시위군중은 체포된 동지들을 돌려받고 다시 (구)역전사거리 제일병원 앞으로 천천히 후퇴하였다. 시위대와 시민들이 광장과 거리에서 주인노릇을 하는 동안, 나는 다음 날 투쟁 약속을 한 후 경찰의 감시를 뚫고 진주농전(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담을 넘어 안전하게 빠져나갔다. 담벼락 너머는 농전 농업시험연구포장이었고, 그 가운데 허름한 이층 목조 건물에는 장현재(경상대 자대 86, 풀무회)가 자취하고 있었다. 거기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새벽에 가좌동 경상대로 스며들었다.

진주 6․26평화대행진은 유월민주항쟁 과정에서 의미심장한 마침표 하나를 찍었다. 무엇보다 최루탄과 진압봉으로 강경진압을 주도한 폭력적인 경찰을 더 강하게 압박하면서도 평화시위의 원칙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이날 진주를 비롯한 국민평화대행진은 한 세대가 지나서야 일어날 촛불집회의 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릎을 치고 혀를 내둘렀다. 나는 이렇게 되뇌었다. ‘과연 한 알의 열매 속에 거대한 나무가 들었다!’

다음날 나는 집회 1차 집결지 사전조사를 위해 호위 없이 나가다가 체포되었다. 걱정하는 후배들에게 최선의 은폐는 자연(自然)한 드러냄(이것은 가두시위를 조직하는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다!)이라며 웃고 나갔으나 보기 좋게 체포된 것이다. 그것은 호방함이 아니라 만용이었던 셈. 진주경찰서의 그들은 이제 시위는 끝났다고 내 앞에서 단언했다. 주동은 시민이니 그럴 리 없다고 내가 주장했으나 어찌 되었건 그들 말이 사실로 되었다. 그들은 내가 한 군중연설을 모조리 녹음해 두고 있었다.

나는 광주민중항쟁에 기대어 정치군인들이 개입하지 못할 거라 믿으면서도(4․13호헌이 국민적 반대에 부딪히자, 전두환은 장세동 등 강경파 실세와 내각을 유월항쟁 직전에 개편하였다) 한편에서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비상조치가 떨어지면 진주경찰서 3층 화장실 계단으로 탈주할 계획도 세웠다. 사력을 다한 협상 끝에 하루에 한 번 TV뉴스를 시청할 수 있었다. 이른바 6․29선언이 있었다. 살기는 살았으나 또다시 양복 입은 정치군인이 대통령 선서를 할 개연성이 높았다. 법원진주지원에서 재판을 받고 7월 중순인가 풀려났다. 가장 먼저 역전파출소 근처 구멍가게를 찾았다. 그 집 아주머니가 지난 6월 26일에 내가 맡긴 책 한권을 돌려주었다.

이 책 한 권, 「일보전진 이보후퇴(레닌)」을 찾아 들고 상업은행 건물에 붙여 노점상을 하시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인생이란 이런 건가? 가두시위 동 뜨는 최적지는 하필이면 아버지 노점 바로 옆이라는 점이 6․26평화대행진을 통해 결정적으로 검정되었다. 아버지는 유월민주항쟁 이전부터 내가 지나가면 곧 가두시위가 일어날 것을 짐작하셨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희생을 감수하고 다른 데서 동을 떠 일찍이 검정된 이 최적지를 교란해야 했다. 한번은 권 모 후배(경상대 국문과 84)의 진주교 시외터미널 쪽 바로 옆 3층 상가에 유인물을 대량 숨겼다가 그의 부친에게 들켜 후배가 곤욕을 치룬 적도 있다. 늦게나마 고마움을 전한다.

유월민주항쟁 33주년을 맞아 기념비를 세우고자 경상대 관계자들을 접촉했을 때 그들은 부자연스런 두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한쪽 얼굴로는 유월민주항쟁 기념비 취지에 공감한다며 그들 몇에게만 유리한 의미를 던지면서 6월 6일 이전에 하면 어떻겠냐고 슬며시 흘렸다. 그것은 어렵겠다고 하자 다른 쪽 얼굴로는 의결 절차가 간단치 않아서 6월 10일까지 결정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좋은 것이 좋다는 장사집의 교훈도 있는데 굳이 이 말을 세상에 드러내는 까닭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고 박노정 시인의 시 일부를 기념비에 넣었다고 하자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것이 경상대와 무슨 관계가 있냐는, ‘특정한 당신’을 비난하려함이 아니라 유월민주항쟁을 이 지경으로 방치한 ‘어떤 나’를 반성하고자 함이다. 나아가 여기 생활 속의 유월민주항쟁을 보고 항쟁주체인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할 것인지 알 수 있는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유라면 오직 이 뿐이다.

탈리 샤롯(Tali Sharot)이 말했다. “회상에 관한 한, 설사 회상되고 있는 사건들이 완벽하게 복제되지 못하더라도, 나쁜 것, 추한 것, 아름다운 것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 부정적인 과거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에 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낙관의 연료일 것이다. 낙관적인 사람이란 반드시 긍정적 편견을 가지고 과거를 보는 사람도 아니고 … 현재를 보는 사람도 아니다. 그동안 온갖 실망스러운 경험을 겪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밋빛 안경을 통해 미래를 보는 사람이다.”(The Optimism Bias: A Tour of the Irrationally Positive Brain, 리더스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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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근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 jspd0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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