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지구촌을 덮친 지 반년이 더 지났다. 앞으로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 하루빨리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해 코로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새롭게 진화한 코로나는 만나지 않기를 더 강하게 희망한다. 기대와 희망과는 달리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 속 좁은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코로나로 인해 겉으로는 많이 변한 듯해도 속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코로나라는 것이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것이 발생한 바탕에는 기후위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기후위기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기후위기라고 외치고 있는, 앞으로 이 세상을 더 오래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이 나라 안팎에 꽤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래전부터 기후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해온 환경운동가들과 학자들도 많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고집한다면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인류는 스스로 파멸에 빠지고 말 것이니 새로운 생활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쩌다가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일상에서는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 이영균 녹색당원

사람들은 왜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걸까? 무엇보다도 불확실성이 그 바닥에 깔려있다. 미래를 예상할 수는 있지만 그 실상을 보여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소비에 빠져 살아도 위기는 먼 미래에 찾아올 것이고 위기를 막으려는 노력이 가져올 효과도 아주 먼 미래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은 그 위기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위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지구의 상황을 볼 때, 언젠가 밀어닥칠 위기에 대한 대비가 없으면 그 위기는 생각보다 더 빨리 닥칠 것이 분명하다. 이야말로 기성세대가 청춘들에게, 오늘날 인류가 미래 지구촌 주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흘러갔으면 하는 아주 강력한 흐름이 있다. 그것은 자본이 부추긴 ‘현재의 포로’ 상태 때문이다. 오늘에 붙잡혀 갇혀 있으니 내일을 볼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내일을 못 보도록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거세당하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뀌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흘려버릴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자본주의 흐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지속 가능성을 말하면서도 소비를 넘어 소모에 대한 관성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범위를 넓혀서 살펴보면 국가주의라는 장벽을 만날 수 있다. 기후위기가 닥치면 한 두 나라만 시련을 겪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가 나서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국제협약을 맺었다가 빠지는 경우도 있고, 아예 논의 마당을 외면하기도 한다.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 이기주의를 확대한 꼴이다. 여기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그리고 후진국 사이에 갈등이 들어 있기도 하다. 선진국은 이미 기후에 많은 부정적인 요인을 안기고 말았다.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이 선진국과 같은 수준으로 문명을 누리게 되면 기후위기는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나서서 문명을 덜 누리고 사는 개도국이나 후진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얼마나 실현 가능할지는 몰라도 일리가 있음은 분명하다. 지구촌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게 된 지 오래지만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촌[村-마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조심스럽지만 이런 생각도 없지는 않을 터이다. 극소수 개인만 당하는 일도 아니고 제법 큰 집단에 한정되는 위기도 아니다. 속된 말이 되겠지만 “나만 죽느냐?”라고 배를 내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은 개인에게 닥치는 위기에 대해서는 극도로 민감하지만 집단이나 전체가 그 대상이 되면 의외로 무덤덤해지고 마는 존재이다. 게다가 사람은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기후위기에 대한 대처가 막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절실한 외침이 필요하다. ‘나만 죽는 것’도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두가 함께 당해야 하는 위기는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상상력을 더 발휘해야 할 때이다.

‘가마솥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 개구리를 집어넣고 장작불을 지피고 있다. 어느 지혜로운 자가 계속 개구리를 향해 “위험하니 가마솥을 빠져 나오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개구리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다가 죽을 지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가마솥에 있는 대부분 개구리들은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외치는 말은 미친 소리가 되고 만다. 개구리들이 밖에서 외치는 소리를 미친 소리로 듣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가마솥에 들어갔을 때는 잘 몰랐는데, 조금 있으니 물은 놀기에 좋을 정도로 미지근해진다. 개구리 운동장으로 좁기는 해도 놀기에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을 터이다. 그리고 따뜻함은 이어진다. 그러니 이보다 더 안락한 공간이 어디에 있는가 싶다. 이런 안락한 공간을 버리고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미친 소리로 여기는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그 안락한 공간은 이내 펄펄 끓어오를 것이고, 그러면 개구리들은 죽음을 맞게 된다.

열을 받고 있는 지구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인간이 점점 더워지고 있는 가마솥에 들앉아 있는 개구리와 얼마나 다를까? 가마솥이 지구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개구리들은 인간인 셈이다. 산업혁명 이후 점점 더해진 문명의 진보는 가마솥에 든 물을 덥혀서 개구리가 놀기 좋게 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도 개구리가 가마솥을 죽음으로써 지킨 것과 같은 처신을 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개구리는 가마솥을 떠날 수도 있지만 인간은 지구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개구리는 아궁이에 피어오르고 있는 불을 끌 수 없지만 인간은 지구를 덥히고 있는 불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기후위기!”라고 외치고 있다.

이제 인간이 자초한 기후위기에 대한 대처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만 죽느냐?”라고 하는 지독한 이기주의-나아가서는 국가주의까지-에 빠져 있어도 되는지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아야 할 때이다. 더 늦기 전에 그래야 한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 있는, 사지를 쫙 뻗은 채로 떠다니는 개구리를 상상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 필자 주 : 지난해 8월부터 ‘녹색상상’이라는 이름을 걸고 달마다 글을 써보았습니다. 녹색상상 앞에 좌충우돌이라는 네 글자를 넣어 ‘좌충우돌 녹색상상’이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좌충우돌하면서 쓴 글이라 일관성도 모자랐고 알맹이는 더 보잘것 없었습니다. 한계를 벗어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더 큰 부끄러움을 지을 수 없어서 글을 매듭지으려고 합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