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금융, 사익 보다 공익

한국 금융의 특징은 ‘관치금융’이다. 정부가 금융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경제관료가 시장의 돈줄과 금맥을 틀어쥐고 있다. 돈이 피라면, 금융은 혈관에 해당한다. 그래서 한국금융은 피의 흐름이 원활하거나 자유롭지 않아 수시로 혈관협착증, 고지혈증, 심근경색 등 연관 질병에 시달린다. 그럴 때마다 ‘돈이 필요한 곳에 돈을 공급하는 금융시스템’에 의해 적재적소에, 적절히 수혈을 받아야 목숨을 부지하는 기업이나 가계가 고질적, 만성적 경영난, 민생고를 겪는다.

▲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돌아보면, 1961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의 제정과 ‘한국은행법’, ‘은행법’의 개정을 통해 금융을 완전히 행정부에 예속시켰다. 금리 결정, 대출 배분, 예산과 인사 등 금융의 주인 노릇을 했다. 1980년대 이후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 조치법’이 폐지되고, 시중은행의 민영화가 이루어졌지만 감독권 등을 통한 관치금융의 위세는 건재하고 갑질은 여전하다.

물론 경제위기가 닥칠 때마다 금융개혁의 목소리는 드높다. 정경유착에 의한 자의적 금융정책과 간섭이 경제위기의 원인이자 경제회생의 걸림돌로 지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금융개혁이란 난제를 벗어나기는 요원해 보인다. 벗어나기는커녕 마침내 ‘정치금융’이라는 정치적 비판마저 터져 나오는 지경이다.

최근 열린 ‘2020 한국금융학회 정기학술대회 및 특별 정책 심포지엄’에서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문재인 정부 금융의 문제점은 정치금융의 팽배, 정치권의 포획, 금융산업정책의 만연”이라며,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금융감독원 감찰 등을 예로 들면서 “가장 큰 문제는 정치 금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전에는 관치 금융을 한국 금융의 특징으로 얘기했는데, 현재 더 문제가 되는 건 정치권의 부패"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금융개혁의 핵심은 금융감독제도의 개편으로서 감독제도를 개편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금감원의 자율성 확대라도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독일 농민의 구세주, 라이파이젠(raiffeisen) 은행

관치금융, 정치금융으로 비판받는 한국 금융과 전혀 다른 금융시스템이 유럽에 있다. 라이파이젠 은행(raiffeisen bank)이다, '라이파이젠'은 사람 이름이다. 쾰른 남동쪽 작은 농촌마을인 바이어부쉬(Weyerbusch)의 시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이파이젠(F.W.Raiffeisen)이 그 사람이다. 오늘날 신용협동조합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라이파이젠이 신용협동조합을 만든 것은 농민의 고리채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다. 19세기 독일의 봉건적 토지소유자와 지배 권력자로부터 농민을 구원하려는 시대적 사명감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은 봉건적 토지소유자와 지배 권력자가 야합한 산업혁명의 부작용과 악영향으로 시달렸다. 도시의 영세 독립 소생산자들과 농촌의 소작농들이 상업자본가의 고리채에 의존하며 가혹한 경제적 수탈을 당했다. 특히 1847년 대기근으로 독일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며 극심한 민생고를 겪었다.

그때 굶주리고 죽어가던 농민들 앞에 라이파이젠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우선 마을 기금을 조성해 농민들에게 곡식을 외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1849년에는 본격적으로 프람멜스펠트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해 농민들에게 가축을 구입할 자금을 빌려주었다. 조합원 60명이 무한연대책임으로 돈을 빌려 가축을 사고 5년 동안 나누어 상환하는 대출방식이었다. 이렇게 농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함께 세운 신용협동조합은 1862년에 라이파이젠 은행(Raiffeisenbank)으로 전환되었다.

신용사업 말고 경제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일종의 유기농업 관련 복합매장인 라이파이젠 마트를 운영한다. 유기농산물, 유기농식품은 물론 유기농종자, 유기농업 관련 농자재와 농기구 등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도시의 소비자는 물론 농민들도 웬만한 먹거리와 농자재는 원스탑 쇼핑이 가능하다.

 

▲ 농민을 위한 ‘라이파이젠협동조합은행’의 경제사업체 ‘라이파이젠 유기농·농자재 마트(ZG raiffeisen markt)’ [사진=정기석]

독일 금융은 농도상생 금융, 협동연대 금융

독일 경제의 기반은 가히 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300여 개에 달하는 신용협동조합, 시민은행(Volksbanken), 신용협동조합이 독일 경제와 농정을 떠받치고 있는 저변이자 저력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라이파이젠 은행은 협동조합이라 증권거래소 기업공개도 안 되고 외부 투자 유치도 어려워 자금조달이 쉽지 않다. 적정한 수익을 유지하며 경영하기가 일반 상업적 법인에 비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구책을 마련했다. 1890년부터 조합원들에게 배당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수익금은 라이파이젠 은행 내부에 순자기자본으로 차곡차곡 적립, 축적되었다.

결과적으로 18세기 마을금고 수준에서 출발한 라이파이젠 신협은 오늘날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은행으로 성장했다. 특히 도시지역의 상인들이 1850년 세운 협동조합은행인 시민은행(Volksbanken)과 합병, 농도상생 금융, 협동연대 금융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재정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 경영을 고수하고 있다. 위기는커녕 오히려 조합원이 늘고 있다. 조합원 보호, 조합원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1000여 개 협동조합은행의 연합체인 프랑크푸르트의 DZ방크(deutsch zentral-genossenschaft bank, 독일중앙조합은행)는 상위기구로서 협동조합은행의 안정된 경영전략과 효과적인 마케팅전략을 책임진다. 구체적으로 예금자 보호를 위한 이중 보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조합의 분담금으로 설립한 보장기금(guarantee funds)과 보장망(guarantee pool)으로 나뉜다. 보장기금은 회원조합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면 보증과 대출을 제공해주고 보조금과 개선대책까지 수립해준다. 회원조합들의 보증으로 운영되는 보장망으로 예금도 전액 보장된다. 예금보호 한도에 제한이 있는 상업은행보다 더 안전한 것이다. 게다가 자체 보호제도는 연방금융감독청 감독 아래 안정적으로 운영, 독일에서는 1930년대 이후 단위 협동조합은행이 파산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고 한다.

'조합원 안전제일'의 독일 협동조합은행은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며 소비자의 신뢰가 더욱 증폭되었다.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150만 명의 조합원이 늘어 2013년 현재 조합원은 1750만 명에 이른다. 매년 30만 명이 신규 조합원으로 가입한 셈이다. 주주의 수익이 아닌 주인인 조합원을 위하는 협동조합원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 농협은 '라이파이젠 농협'으로 재활해야

라이파이젠 등 독일의 협동조합은행을 생각하면, 한국의 농협이 저절로 겹친다. 태생적으로 농민을 상대로, 지역을 무대로 관치금융의 첨병 역할을 해온 한국의 농협은 '공룡 같은 비대조직' 중앙회, '무소불위의 제왕' 중앙회장으로 상징된다.

오늘날 한국 농협은 일반 상업적 은행과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 '농민의 소득을 위한' 경제사업보다는 '농협이 돈 버는' 신용사업에 매달려 있다. 심지어 농민이 아닌 도시민을 주거래고객으로 삼아 '돈 놓고 돈 먹는 돈장사'에 열중하고 있다. 지역농협조차 신용사업 수익에 목을 매달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농업소득과 밀접한 농산물 생산·가공·판매 등 경제사업은 적자사업, 환원사업으로 소홀히 하고 있다.

이른바 '신경 분리(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도 성공적이지 않다. 오히려 협동조합 방식이 아닌 주식회사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농협중앙회는 거대 지주회사로 변신하고 말았다. 농협중앙회는 '회원의 공동 이익증진과 그 건전한 발전을 도모(농협법 제1113조)'를 목적으로 하는 연합회 조직으로부터 더 멀어졌다.

농협의 개혁은 중앙회에서 시작해야 한다. 중앙회장부터 조합원들이 직선으로 선출해야 한다. 금융기관으로서 경제적 권력보다 협동조합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충실하려면, '협동조합'이라는 본질적 정체성과 신뢰를 회복하려면 그게 최우선숙제이자 상책이다. 또 중앙회는 '회원조합을 지원하는 연합회'로 재편, 비사업적 기능에만 전념해야 한다, 사업은 회원조합의 연합회 체제로 전환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농협은 ‘일반 금융회사’가 아니라 '농업협동조합의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단 죽어서 '라이파이젠 농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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