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의 흔적을 찾아서

▲ 8월 지리산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사진=최세현)

또다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8월 초록걸음도 급하게 길동무들에게 행사를 취소한다고 연락했다. 하지만 본인 차로 오실 분들이 계시면 함께 걷기로 했다. 집을 나서 의신마을로 가는 길, 남도대교 근처 섬진강 둔치에 쌓아둔 엄청난 양의 쓰레기 더미를 보면서 이번 폭우로 화개면이 얼마나 큰 수해를 입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번에 겪은 54일간의 최장 장마에서 이상기후 정도가 아니라 기후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화개장터를 지나왔다. ‘기후악당국가’로 전락한 우리나라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지리산을 더더욱 지켜야만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 (사진=최세현)

서산대사길이라 불리기도 하는 지리산 옛길은 의신마을에서 신흥마을까지 총연장 4.2Km의 산길로 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되는데, 의신마을 입구에 자리한 ‘지리에어’ 공장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윤상기 하동군수가 외국으로 수출까지 한다며 대대적으로 자랑하던 공기 캔 공장,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수지타산이 맞질 않아 공장 가동을 멈추었다니... 의신마을에서 30분가량 오르면 닿는 원통암은 서산대사가 출가한 암자로 유명한데, 그 자리가 지리산의 배꼽이라고들 한다. 아무튼 의신마을은 ‘탄소 없는 마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관광객 유치에 힘을 쏟고 있긴 하지만 과연 지속가능한 관광이 될지는 시간이 더 지나봐야 알 것이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듯 싶었다.

 

▲ (사진=최세현)

코로나19가 재확산되는 바람에 지리산 옛길의 시작점이 되는 의신베어빌리지 앞에 모인 길동무는 필자 포함 5명이었다. 10년째 진행되고 있는 초록걸음 역사상 가장 적은 인원으로 말 그대로 소수정예로 그 걸음을 시작했다. 그래도 고로쇠 수액으로 유명한 의신마을답게 지리산 옛길 시작부터 고로쇠나무가 빽빽했고 지난 봄에 수확하느라 설치한 호스가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지리산 옛길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숲길의 정취를 만끽하게 하는,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길임이 분명하다.

긴 장마 끝인지라 옛길 중간중간엔 폭우의 흔적이 있긴 했지만 화개나 구례 수해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작은 시냇물이 여기저기 졸졸 흐르고 있어 듣는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단촐한 길동무들인 까닭에 좀 더 심도 있는 숲해설을 진행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구간 전체가 국립공원 구역이라 물놀이를 즐길 수 없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점심 도시락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먹을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 푸조나무(사진=최세현)

임진왜란 때 일본이 가져가려던 의신사 범종을 서산대사가 의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의자바위를 거쳐 높이가 20m 넘는 감감바위까지 지나면 옛길의 마지막 관문이 나온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옛 신흥사가 있었던 왕성분교에 다다르면서 지리산 옛길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길의 끝에는 두 가지 덤이 길동무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가장 덩치가 크다는 500세 푸조나무와 최치원 선생이 속세에 찌든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며 바위에 글씨를 남겼다는 세이암(洗耳岩)이다. 푸조나무가 보이는 계곡 가운데 있는 세이암은 국립공원 구역 밖이라 계곡물 속에 풍덩 뛰어들어 물놀이를 맘껏 즐길 수 있으니 땀 흘려 걷고 난 다음에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소수정예 길동무들도 재확산된 코로나와 긴 장마로 눅눅해진 영혼을 헹구며 8월의 초록걸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낙장불입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시 ‘지리산 옛길’로 걸어왔던 길을 복기하면서...

 

▲ (사진=최세현)

 

지리산 옛길 / 이원규

 

살다 지쳐 자주 팍팍한 날이면

세상사 낡은 외투 훌훌 벗어던지고

화개동천 지리산 옛길로 가자

세이암 맑은 물에 두 귀를 씻고

연초록 산바람에 백태 낀 눈동자를 헹구자

저마다 외로운 구름처럼

한 마리 보리은어의 첫 마음으로 거슬러 오르자

 

아직 어린 새색시 첩첩 울며 시집오고

의신마을 코흘리개들 가갸거겨 배고픈 쇠점재

저 홀로 버림받은 사람도

아랫도리 후덜덜 화개장터 소금장수도

어금니 꽉 깨물고 넘던 사지넘이고개

날마다 서산대사는 입산출가의 자세로 오가고

비운의 혁명가 화산 선생은 빗점골로 들어가

마침내 죽어서야 돌아왔다

 

살다 지쳐 자주 침침한 날이면

저잣거리 빛바랜 안경을 벗어던지자

감감바위 아래 그 무거운 봇짐일랑 내려놓고

금낭화 피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그냥 금낭화가 되자

산나물 조금 안다고 뜯지도 캐지도 말고

박새 초오 지리강활 동의나물

여차하면 독이 되는 오욕의 풀일랑 키우지 말고

그저 가만가만 보리은어의 눈빛으로

착한 다람쥐꼬리처럼 따숩게 두 손을 잡자

 

그래도 못다 한 속울음이 남았다면

벽소령 희푸른 달빛을 보며

대성폭포처럼 그예 대성통곡을 하자

그리고 돌이끼처럼 다시는 울지 말자

그 누구라도 외로운 산신령, 서러운 신선

온종일 의신동천 물소리로 내장을 헹구러 가자

모세혈관마다 연초록 바람이 이는 지리산 옛길로 가자

 

▲ 8월 지리산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사진=최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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